고춧가루

고춧가루

분류 문학 > 현실적인물형 > 해학(諧謔)형

• 갈래 : 민담
• 시대 : 시대미상
• 신분 : 관료
• 지역 : 기타
• 출처 :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옛이야기 백 가지 ()
• 내용 :
이 고을 원과 한다하는 양반들이 삼복에 시원한 정자에 올라 더위를 피하며 놀고 있었다. 농사 짓는 백성들이야 삼복 더위에 일손을 놓을 수 없으니 비지땀을 흘리면서 물 대고 김 매고 거름 주고 바쁘게 돌아가지만 할 일 없는 양반들은 주안상 받아놓고 한가하게 글이나 읊조리고 놀았다. 이렇게 흥에 겨워 놀고 있는데 지나가던 봇짐장수가 무엄하게도 양반들 노는 곳에 와서 넙죽 엎드려 “소인이 하도 억울한 일을 당하여 사또께 고하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했다. 무례한 놈을 당장 내쫓고 싶지만 그랬다가 좌중의 흥이 깨질까하여 고을 원이 짐짓 부드럽게 대하며 무슨 일인가 물으니 “소인은 장돌뱅이 고춧가루 장수입니다. 그런데 오늘 동천 앞을 지나다가 장사 문서를 언문으로 썼다하여 죽도록 곤장을 맞고 오는 길입니다. 잘 살펴주십시오.” 고을 원은 사리 밝은 사람이 못 되어 도리어 고춧가루 장수를 나무랐다.

“그것은 말할 일이 못 되느니라. 왜 나라에서 쓰라는 진서는 쓰지 않고 쓰지 말라는 상놈의 글을 썼느냐” 고춧가루 장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대뜸 “소인이 무식하여 진서를 몰라 그리 되었습니다. 그러니 바라옵건대 진서로 ‘고춧가루’를 어떻게 쓰는지 가르쳐 주십시오.”했다. 고을 원이 눈만 멀뚱거리며 좌중을 둘러보니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놈의 고춧가루를 중국 글자로 어떻게 쓰는지 알아야 말이지. 대학 중용 논어 맹자에 고춧가루라는 놈이 나올 턱이 있나 이때 김 매러 가던 농사꾼이 그 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사람이 갑자기 정자를 올려다보면서 껄걸 웃어제꼈다. 안 그래도 하찮은 장돌뱅이 앞에서 체면이 깎일대로 깎인 판인데, 농사꾼까지 웃어대니 죽을 맛이었다.

원은 농사꾼을 불러 감히 양반 앞에서 무례하고 웃었으니 사죄하라고 호통을 쳤다. 농사꾼이 정자 위로 올라와 하는 말이 “양반이 양반 글을 쓸 줄 몰라 막힌 걸 보고 누가 웃지 않겠습니까 저는 비록 땅을 긁어먹고 사는 농투성이오나 그까짓 고춧가루쯤은 눈 감고도 쓰겠습니다.” 이러는 것이었다. 원은 부아가 치밀어 붓대를 농사꾼에게 던지며 “그래 네 놈이 어디 한 번 써 보아라. 만약에 쓰지 못하면 양반을 능멸한 죄로 주리를 틀리라.” 하고 바락바락 악을 써댔다. 농사꾼은 태연하게 허리춤에서 호미를 꺼내더니 땅바닥에 큼직하게 열 십(十)자를 그었다. “자 보십시오. 이렇게 고추(곧추) 내려 그었으니 ‘고추’요, 가루(가로) 그었으니 ‘가루’가 아닙니까” 고춧가루 장수가 그것을 보더니 무릎을 탁 치면서 “옳지, 이게 바로 고춧가루로구나. 진짜 글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구려.” 고춧가루 장수와 농사꾼은 한바탕 껄걸 웃고 나더니 제 갈 길로 갔다. 점잔을 빼며 앉아있던 양반들은 풀 죽은 베잠방이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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