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종]일본의 대내전이 구하기를 청한 《대장경》에 대한 일을 논의하게 하다

[조선 성종]일본의 대내전이 구하기를 청한 《대장경》에 대한 일을 논의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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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내전(大內殿)이 구청(求請)한 《대장경(大藏經)》에 대한 일을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의정부(議政府)에 의논하게 하였는데, 정창손(鄭昌孫)은 의논하기를, ˝우리 전하(殿下)께서 부처[佛]를 좋아하지 않으시니, 이단(異端)의 책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족히 보전(寶典)이 못됩니다. 그러나 《대장경(大藏經)》은 그 수량이 많지 않으니, 권사(權辭)로 허락하지 않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고, 한명회(韓明澮)·심회(沈澮)·윤필상(尹弼商)·이극배(李克培)·윤호(尹壕)·정괄은 의논하기를, ˝대내전(大內殿)은 다른 도이(島夷)와 비교할 수 없으며, 국가(國家)에서 후대(厚待)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그 청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고, 노사신(盧思愼)은 의논하기를, ˝《대장경》은 이단(異端)의 책이므로, 비록 태워버린다 하더라도 가(可)합니다. 더욱이 인접(隣接)한 국가에서 구하니, 마땅히 아끼지 말고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장경》 1건(件)을 만들려면 그 경비(經費)가 매우 많이 들어서 쉽사리 판비(辦備)할 수가 없습니다. 앞서는 국가에 무익(無益)하였기 때문에 왜인(倭人)들이 와서 구하면 문득 아끼지 않고 주었으니, 그 까닭은 공사(公私)간에 《대장경》을 만드는 바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모르기는 하지만 지금 몇 건쯤 있습니까? 얼마 있지 아니하다면 쉽사리 그 청을 따를 수가 없을 듯합니다. 대내전(大內殿)이 비록 우리나라에서 특별한 예로 후대하는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에 있어서 해도(海島)가 요원하고 성세(聲勢)가 접해 있지 아니하여, 비록 뜻을 들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우리에게 노심(怒心)을 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 섬에서 우리나라에 공물(貢物)을 바치는 것이 한둘이 아니고, 저 나라 사람들은 부처를 좋아하므로, 《대장경》을 얻었다면 금(金)·옥(玉)같이 여길 뿐만 아니라, 대내전이 《대장경》을 하사받은 것을 듣는다면 반드시 이를 본받아 벌떼같이 일어나서 주기를 바랄 것인데, 현재 있는 《대장경》이 부족하여 주려고 해도 주지 못한다면 저들이 누구는 후대(厚待)하고 누구는 박대(薄待)한다고 일컬으며 실망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때를 당하여 어떻게 민력(民力)을 아끼지 않고 또 인쇄하여 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생각하건대, 마땅히 그 사인(使人)에게 말하기를, ‘전일(前日)에 너희 나라에서 《대장경》을 청구한 것이 한 번이 아니었지만, 국가에서 인쇄한 것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일일이 그 청을 따랐었는데, 지금은 모두 쓰고 남은 것이 없어서 청을 따를 수가 없다.’라고 답하여 보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고, 이파는 의논하기를, ˝대내전은 특별한 예로 후대하는 사람이지만, 이보다 전에 비록 여러 번 《대장경》을 청하였는데도 곧 따를 수 없었던 것은 운반하는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는데, 더욱이 올해는 크게 흉년이 든 것이겠습니다. 이와 같이 사세(事勢)를 인편에 잘 유시(諭示)하고, 그 밖에 접대(接待)하는 절차에서 극진히 후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고, 정난종(鄭蘭宗)은 의논하기를, ˝대내전이 스스로 말하기를, 선대(先代)의 세계(世系)가 우리나라로부터 나왔으므로, 이미 예전부터의 우호 관계가 있어, 후대하는 것이 여러 추장(酋長)과 달랐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온 사인도 다른 것은 구하는 것이 없고 단지 이 《대장경》만을 청하니, 청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단지 이 《대장경》은 비록 글자는 찼다고 하나, 쓸모 없는 질(帙)인데, 1건에 드는 경비가 실로 많으며, 지금 우연히 찾는 것으로 인연하여 특별한 공로(功勞)도 없이 갑자기 그 청을 따른다면 여러 추장이 벌떼같이 일어나서 청할 것이니, 형편상 모두 들어주기가 어렵습니다. 단지 1부(部) 가운데 정요(精要)한 내전(內典)으로 《능엄경(楞嚴經)》·《법화경(法華經)》·《금강경(金剛經)》·《능가경(楞伽經)》 등과 같은 것 약간의 질(帙)을 뽑아서 주고, 예조(禮曹)에서 답서하기를, ‘돌아보건대, 이 《대장경》은 전자에 귀국(貴國)의 여러 사인이 청하여 가지고 갔으므로, 거의 다하여 남은 것이 많지 않다. 지금 정요한 내전(內典) 약간의 질(帙)을 가지고 간절한 요구에 응한다.’라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저들이 청하는 것을 막는 실수가 없을 것이고 저들 또한 얻는 것이 있으니, 거의 양쪽이 모두 편할 것입니다.˝ 하였다.
• 출처 : 『조선왕조실록』 성종 16년 9월 16일(갑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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