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종]제주도 표류인 김비의 등으로부터 유구국 풍속과 일본국 사정을 듣다

[조선 성종]제주도 표류인 김비의 등으로부터 유구국 풍속과 일본국 사정을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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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濟州)에 표류(漂流)했던 사람 김비의(金非衣)·강무(姜茂)·이정(李正) 등 세 사람이 유구국(琉球國)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지나온 바 여러 섬의 풍속(風俗)을 말하는 것이 매우 기이(奇異)하므로, 임금이 홍문관(弘文館)에 명하여 그 말을 써서 아뢰라고 하였다. 그 말에 이르기를, ˝우리들이 정유년 2월 1일에 현세수(玄世修)·김득산(金得山)·이청민(李淸敏)·양성돌(梁成突)·조귀봉(曹貴奉)과 더불어 진상(進上)할 감자(柑子)를 배수(陪受)하여 같이 한 배에 타고 바다로 출범(出帆)하여 추자도(楸子島)로 향해 가다가, 갑자기 크게 불어오는 동풍(東風)을 만나 서쪽으로 향하여 표류하였습니다. 처음 출발한 날로부터 제 6일에 이르러서는 바닷물이 맑고 푸르다가, 제 7일부터 제 8일까지 1주야(晝夜)를 가니 혼탁(渾濁)하기가 뜨물과 같았으며, 제 9일에 또 서풍(西風)을 만나서 남쪽을 향하여 표류해 가니 바닷물이 맑고 푸르렀습니다. 제 14일 째에 한 작은 섬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미처 기슭에 대이지 못하여 키가 부러지고 배가 파손되어 남은 사람은 모두 다 물에 빠져 죽고, 여러가지 장비도 모두 물에 빠져 잃어버렸으며, 우리들 세 사람은 한 판자에 타고 앉아 있었습니다. 표?漂蕩)하는 사이에 마침 고기잡이배 두 척이 있어서 각각 네 사람이 타고 앉아 있다가 우리들을 발견하고는 거두어 싣고 가서 섬 기슭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윤이시마라고 【그곳 풍속에 섬을 일컬어 시마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인가(人家)가 섬을 둘러 살고 있고, 둘레는 이틀 길이 될 듯하며, 섬사람은 남녀 1백여 명으로 풀을 베어 바닷가에 여막을 만들어서 우리들을 머물게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제주(濟州)를 출발한 때로부터 큰 바람이 파도를 일으켜 파도가 이마 위를 지나고, 물이 배 가운데 꽉 차서 뱃전이 잠기지 않은 것은 두어 판자뿐이었습니다. 김비의와 이정이 바가지를 가지고 물을 퍼내고, 강무는 노(櫓)를 잡았으며, 나머지는 모두 다 배멀미를 하여 누워 있어서 밥을 지을 수가 없어 한 방울의 물도 입에 넣지 못한지가 무릇 열나흘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섬사람이 쌀죽[稻米粥]과 마늘을 가지고 와서 먹였습니다. 그날 저녁부터는 처음으로 쌀밥 및 탁주(濁酒)와 마른 바다물고기를 먹었는데, 물고기 이름은 다 알지 못했습니다. 7일을 머문 뒤에 인가(人家)에 옮겨 두고서 차례로 돌려가며 대접을 하는데, 한 마을에서 대접이 끝나면 문득 다음 동네로 체송(遞送)하였습니다. 한 달 뒤에는 우리들을 세 마을에 나누어 두고 역시 차례로 돌려가며 대접하는데, 무릇 술과 밥은 하루에 세끼였으며, 온 섬사람의 용모(容貌)는 우리나라와 동일(同一)했습니다. 1. 그 나라 풍속은 귀를 뚫어 푸르고 작은 구슬로써 꿰어 2, 3촌쯤 드리우고, 또 구슬을 꿰어 목에 3, 4겹을 둘러서 1자[尺]쯤 드리웠으며, 남녀(男女)가 같이 하는데 늙은 자는 안했습니다. 1. 남자·여자 모두 다 맨발로 신이 없었습니다. 1. 남자는 머리를 꼬아 곱쳐서 포개어 삼베 끈으로 묶어서 목 가에 상투를 틀었는데 망건(網巾)을 쓰지 않았습니다. 수염은 길어서 배꼽을 지나갈 정도인데, 혹은 꼬아서 상투를 두어 겹을 둘렀습니다. 부인(婦人)의 머리도 길어서 서면 발뒤꿈치까지 미치고 짧은 것은 무릎에 이르는데, 쪽을 찌지 않고 머리 위에 둘렀으며, 옆으로 나무빗을 귀밑머리에 꽂았습니다. 1. 가마·솥·숟가락·젓가락·소반·밥그릇·자기(磁器)·와기(瓦器)는 없고, 흙을 뭉쳐서 솥을 만들어 햇빛에 쪼여 말려서 짚불로써 태워 밥을 짓는데, 5,6일이면 문득 파열(破裂)해 버립니다. 1. 쌀[稻米]을 전용(專用)하고, 비록 조(粟)가 있더라도 심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였습니다. 1. 밥은 대나무 상자에 담아서 손으로 뭉쳐 덩어리를 만들되 주먹 크기와 같이 하고, 밥상은 없고 작은 나무 궤를 사용하여 각각 사람 앞에 놓습니다. 매양 밥을 먹을 때에는 한 부인이 상자를 맡아서 이를 나누어 주며 사람마다 한 덩어리씩인데, 먼저 나뭇잎을 손바닥 가운데 놓고 밥덩이를 그 나뭇잎 위에 얹어 놓고 먹으며, 그 나뭇잎은 연꽃잎과 같았습니다. 한 덩어리를 다 먹으면 또 한 덩어리를 나누어 주어 세 덩어리로 한도<중략>
• 출처 : 『조선왕조실록』 성종 10년 06월 10일(을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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