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종]유구국의 문서에 답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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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낭관(郞官)을 동평관(東平館) 에 보내어 유구국(琉球國)의 사신에게 힐문하기를, ˝너희들이 가지고 온 국왕 서계(書契)의 인적(印跡)이 기해년 과 계묘년 두 해의 서계 인적과 같지 않아서 믿기가 어렵다.˝ 하니, 범경(梵慶)이 대답하기를, ˝국왕께서 서계를 봉(封)하여 저에게 주셨고 저는 다만 받아 왔을 뿐이니, 인적이 같은지 같지 않은지는 제가 감히 알수 없습니다.˝ 하였고, 야차랑(也次郞)은 대답하기를, ˝제가 국왕의 서계를 받아 온 것이 이미 네 번입니다. 그러나 그 인적이 같고 다른 것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래서 또 말하기를, ˝한 나라의 임금이 어찌 두 개의 도장을 쓰겠는가? 위조한 것이 명백하다.˝ 하니, 야차랑이 말하기를, ˝이에 앞서 박다(博多) 사람 도안(道安)이 수차 유구 국왕의 서계를 받아 귀국(貴國)에 사신으로 왔었는데, 저도 박다 사람입니다. 비록 본국에 사는 자라 하더라도 간혹 나라의 일을 알지 못할 수도 있는데 더구나 저는 다른 곳의 사람이니, 유구 국왕이 쓰는 인신(印信)이 하나인지 둘인지 혹은 열 개에 이르는지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답(答)하는 서계를 빨리 써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하면서 야차랑 등이 매우 간절하게 답서(答書)를 받고자 하였습니다. 이제 만약 거부하고 따르지 않는다면, 짐승 같은 마음을 가진 무리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분을 품을 것이 확실합니다. 우선 그 청에 따라 국왕(國王)에게, ˝두 나라에서 우호(友好)를 통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다만 왼쪽 서계가 없어 오직 인신(印信)으로 증험을 삼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온 야차랑·범경 등이 가지고 도착한 서계의 인적은 전문(篆文)을 이루지도 못하였고 이전의 서계와 크게 서로 달라서 믿을 만한 사신으로 대접할 수 없습니다.˝라는 뜻으로 글을 써서 답하고, 대마 도주(對馬島主)에게도 아울러 유시하도록 하소서.˝ 하니, 대신(大臣)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윤필상(尹弼商) 등이 의논하기를, ˝아뢴 바에 의거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 출처 : 『조선왕조실록』 성종 24년 6월 12일(갑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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