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종]야차랑이 가져온 유구국의 서계가 위조임이 드러나다

[조선 성종]야차랑이 가져온 유구국의 서계가 위조임이 드러나다

분류 교통/통신/지리 > 해양문화사전 > 해양사 > 교류

좌승지(左承旨) 김응기(金應箕)가 아뢰기를, ˝야차랑(也次郞)이 유구 국왕(琉球國王)의 서계(書契)를 받아 온 것이 모두 세번이었습니다. 처음에 가지고 온 서계의 인문(印文)은 전날 다른 사신(使臣)이 가지고 왔던 서계의 인문과 같았었는데, 후에 가지고 온 서계와 이번에 가지고 온 서계의 인문 자획의 대소(大小)가 자못 달랐습니다. 또 전에 가지고 왔던 서계 안에는 보내는 부험(符驗) 인신(印信)의 반쪽의 글자를 아울러 기록하였기 때문에 그 사신이 와서 머무르는 포소(浦所) 에서는 반드시 먼저 부험을 합쳐본 후에 접대하였었는데, 이번에는 이 말이 없어 더욱 믿기 어렵습니다.˝ 하고, 도승지(都承旨) 조위(曹偉)는 아뢰기를, ˝야차랑(也次郞)은 지난해에 우리나라에 왔다가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갑자기 또 올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인문(印文)이 전번 서계의 인문과 같지 않으니, 이는 의심할 만합니다. 저들은, 우리가 유구국(琉球國)의 사신을 매우 후하게 대접하고 회봉(回奉) 도 많기 때문에, 서계를 위조해 가지고 와서 자기의 이익을 엿보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미 간사함을 알았는데도 전례에 의하여 후하게 접대한다면 후에는 반드시 ???속이기를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회답하는 서계에, 부험이 없으면 믿기 어렵다는 뜻을 명백히 알리고 답사(答賜)도 줄이는 것이 어떠할까 생각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허위임이 매우 명백하니, 가지고 온 물건을 돌려주고 접대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는가? 예조(禮曹)에 묻도록 하라.˝ 하였다. 김응기(金應箕)가 또한 성화(成化) 6년 에 유구 국왕 상덕(尙德)이 보냈던 도장 찍은 오른쪽 서계를 가지고 들어와서 인해 아뢰기를, ˝상덕이 이 글을 보내고 나서 그 후의 서계에도 이 도장을 찍어 보냈으니, 빙험(憑驗)하여 접대하리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상원(尙圓)이 보낸 인적(印跡)은 상덕과 다름이 있으니, 서로 맞출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 출처 : 『조선왕조실록』 성종 24년 6월 9일(신미)조.

연관목차

474/2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