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종]선위사 이칙이 제주도 표류인을 데리고 온 상황을 유구국의 사신에게 듣고 아뢰다

[조선 성종]선위사 이칙이 제주도 표류인을 데리고 온 상황을 유구국의 사신에게 듣고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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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위사(宣慰使) 이칙(李則)이 치계(馳啓)하기를, ˝지금 온 유구국(琉球國)의 사신(使臣)은 상관인(上官人) 신시라(新時羅)와 부관인(副官人) 삼미삼보라(三未三甫羅), 압물(押物) 요시라(要時羅)·야이라(也而羅), 선주(船主) 피고구라(皮古仇羅) 및 반종인(伴從人)·격인(格人) 등 합해서 2백 19인(人)과 제주(濟州) 표류인(漂流人) 김비을개(金非乙介)·강무(姜茂)·이정(李正) 등이 3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이번 5월 3일 염포(鹽浦)에 도착하였습니다. 상관인이 말하기를, ˝우리는 본래 박다(博多) 사람인데, 지난 정유년 10월에 부관인(副官人)과 더불어 흥판(興販) 으로 인하여 유구국(琉球國)에 갔다가 마침 귀국(貴國)의 표류인(漂流人)이 도착하여 정박하고 있는 것을 만났는데, 국왕(國王)이 서계(書契)를 주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압래(押來)하라고 하였으므로, 무술년 7월 28일에 배를 출발시켜 나왔습니다. 본년(本年) 9월에 대내전(大內殿)이 소이전(小二殿)과 서로 싸워서 대내전이 싸움에 이기고, 축전주(筑前州)와 풍전주를 취하여 대관(代官)을 보내서 이를 지키게 하였고, 소이전은 싸움에 패하여 비전주(肥前州) 등지에 도망가서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김비을개·강무·이정은 말하기를, ˝우리들은 제주 사람으로 지난 정유년 2월 1일에 진상(進上)할 감자(柑子)를 받아 가지고 그 주(州)의 사람인 현세수(玄世守)·이청밀(李靑密)·김득산(金得山)·양성석이(梁成石伊)·조괴봉(曹怪奉)과 비거 도선(鼻居刀船)을 타고, 추자도(楸子島)에 이르러 바람을 만나 서쪽을 향하여 표류하다가, 제 7일에는 남쪽으로 향하여 표류하였는데, 제 11일에는 김득산이 주리고 병들어 죽었고, 제 14일 아침에는 장차 한 섬에 머무르려고 하다가 배가 부서져서 현세수·양성석이·이청밀·조괴봉 등은 익사(溺死)하고, 우리들은 언덕을 더위잡아서 죽지 않았습니다. 마침 고기잡잇배 두 척을 만났는데, 수상막(水上幕)으로 싣고 돌아가서 죽(粥)을 끓이어 먹이고, 제 16일에 그 집으로 데리고 가서 윤차(輪次)로 밥먹여 주었습니다. 섬 이름은 윤이(允伊)라 일컫고, 사는 사람은 장대(長大)하고, 수염(鬚髥)이 길었으며, 여자는 서면 머리털이 땅에 이르고, 남자는 앉으면 수염이 무릎에 이르렀습니다. 언어(言語)와 의복(衣服)은 왜인(倭人)과 같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조선국(朝鮮國)이라는 3자를 풀잎에 써서 보이니, 알지 못하였습니다. 여섯 달을 머물게 되었는데, 섬사람 13명이 우리들을 거느리고 작은 배를 타고, 동쪽으로 향하여 이틀 낮 하룻밤을 가서 소내도(所乃島)에 정박했습니다. 다섯 달을 머문 뒤 섬사람 5명이 우리들을 이끌고 작은 배를 타고서 동쪽으로 향하여 하루 동안을 가서 패돌마도(悖突麻島)에 정박하였으며, 한 달을 머문 다음 섬사람 5명이 우리들을 이끌고 작은 배를 타고 동쪽으로 향해 가서 발내이도(勃乃伊島)에 머물다가, 한 달을 지나 섬사람 5명이 우리들을 인솔하고, 작은 배를 타고 동쪽으로 향하여 하루를 가서 후이시마도(后伊是麻島)에 정박했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섬사람 10명이 우리들을 이끌고 중선(中船)을 타고 동쪽으로 향하여 하루 낮 하룻밤을 가서 탈라마도(脫羅麻島)에 머물었습니다. 한 달을 유(留)한 뒤에 섬사람 8명이 우리들을 이끌고, 작은 배를 타고 동쪽으로 향하여 하루를 가서 이라파도(伊羅波島)에 머물었는데, 위에서 말한 각 섬에 사는 사람의 언어와 의복은 윤이와 서로 비슷했습니다. 한 달을 머문 뒤에 섬사람 6명이 우리들을 이끌고, 작은 배를 타고, 동쪽으로 향하여 하루를 가서 패라미고도(悖羅彌古島)에 머물었는데, 사는 사람의 의복은 먼저의 섬과 같았고, 언어는 조금 달랐습니다. 한 달을 머물고, 섬사람 10명이 우리들을 이끌고 중선(中船)을 타고 동쪽으로 향하여 사흘 낮 이틀 밤을 가서, 유구국의 해변(海邊)에 이르렀다가 제 3일에 관부(官府)로 인도되어 갔더니 관대(館待)가 매우 후 하였습니다. 어느 날에 국왕(國王)이 황금(黃金)으로 꾸민 대련(大輦)을 타고, 앞과 뒤로는 군위의 의장(儀仗)이 매우 성(盛)하였으며, 또 10여 세가 되는 남자(男子)가 말을 타고 수행(隨行)하는데, 병위가 또한 성하였<중략>
• 출처 : 『조선왕조실록』 성종 10년 5월 16일(신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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