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종]일본국 통신사 이형원과 부사 이계동·서장관 김흔 등과 사목에 대해 논의하다

[조선 성종]일본국 통신사 이형원과 부사 이계동·서장관 김흔 등과 사목에 대해 논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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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서, 일본국 통신사(日本國通信使) 이형원(李亨元)과 부사(副使) 이계동(李季仝), 서장관(書狀官) 김흔 및 군관(軍官)·통사(通事) 등을 인견(引見)하였는데, 경연관(經筵官)과 승지(承旨)가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이형원에게 이르기를, ˝잘 갔다가 오도록 하라.˝ 하니, 이형원이 대답하기를, ˝성상의 덕(德)이 지극히 중(重)하시니, 신 등이 왕래(往來)하는 데에 반드시 아무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사목(事目) 가운데 미진한 곳이 있습니다만, 일일이 기억하여 아뢸 수가 없습니다. 신이 듣건대 지난번에 통신사(通信使)가 적간관(赤間關)에 도착하면, 반드시 대내전(大內殿)에 보고하여 가부(可否)를 들은 뒤에 나아가거나 물러나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열흘 내지 달포 가량 머물러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신이 갔을 때에 만약 또 치보(馳報)하고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겠습니까?˝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명색이 통신사(通信使)인데 들어가지 못하게 할 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때에 따라 잘 처신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영사(領事) 김국광(金國光)이 아뢰기를, ˝예전에 박희중(朴希中)이 갔을 때 대장경(大藏經)을 가지고 가지 않았던 까닭에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다가, 두세 번 청한 연후에야 허락하였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국가에서 교린(交隣)을 중히 여기고 통신사(通信使)를 보내는데, 어찌 받아들이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김국광에게 술잔을 올리도록 명하였다. 이형원이 아뢰기를, ˝통사(通事)는 모두 검은 모자[烏帽]를 쓰고, 군관(軍官)은 모두 군복[戎服]을 입는데, 이로 인하여 지나가는 여러 고을에서 통사는 반드시 정관(正官)으로 대접하면서 군관은 반드시 통사보다 아래로 취급합니다. 신은 군관도 아울러 정관(正官)을 보내기를 원합니다.˝ 하니,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홍귀달(洪貴達)에게 이르기를, ˝군관(軍官)도 아울러 정관(正官)을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이형원이 아뢰기를, ˝대마도(對馬島)를 출발하여 25일을 가야지만 일본국(日本國)에 도달하는데, 대마도 사람들이 만약 가는 길을 가리켜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후한 선물을 주고서 묻는 것이 좋겠다.˝ 하고, 이형원이 아뢰기를, ˝지금 가는 통사(通事) 등무수(藤茂秀)는 그 부모(父母)가 모두 대마도(對馬島)에 있으니, 만일 고향을 그리워하여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고향이 그리워서 떠나 오려 들지 않는다면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어서 이형원(李亨元)에게 술잔을 올리도록 명하고, 이계동(李季仝)·김흔에게도 차례로 술잔을 올리도록 명하였으며, 홍귀달에게 명하여 군관(軍官)·통사(通事)에게 술을 내려 주도록 하였다.
• 출처 : 『조선왕조실록』 성종 10년 4월 1일(정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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