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

과부

분류 문학 > 현실적인물형 > 지략(智略)형

• 갈래 : 전설
• 시대 : 조선
• 신분 : 일반
• 지역 : 기호
• 출처 : 김근태 ()
• 내용 :
서울시 중랑구 중화동 303-10번지에 성덕사가 있는데 이곳은 터가 세서 사람 살 곳이 못 되었다는 곳이다. 구한말(舊韓末) 봉화산 자락에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겨울에 산에 올라 나무를 하는데 도끼로 나무를 다 자른 다음에 보니 원래대로 나무가 빽빽하게 서 있었다. 노인이 산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다른 마을사람도 그 산의 나무에 귀신이 붙었다고 맞장구를 치며 자신들도 일을 이야기하였다. 이 때 마을에 들렀던 한 스님이, 그곳은 많은 호열자가 나돌 때 채 죽지 않은 아이들까지도 한꺼번에 내다버려 공동묘지가 되었던 곳이니 이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정성껏 치성을 드리지 않으면 매년 그만한 숫자의 아이들이 죽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매년 정월 보름에 짚으로 아이인형을 만들어 옷을 입히고 등 뒤에 이름과 나이, 남녀의 구별 및 신체의 특징을 써서 나무에 걸어놓고 애동지가 들었을 때는 절대 팥죽을 쑤어 먹으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이 말을 믿은 한 과부가 매년 동구 밖 나무에 인형을 매달아 치성을 드려 화를 면했다. 그러나 애동지가 들던 어느 해, 마을 사람들은 스님이 했던 이야기도 잊은 채 집집마다 동지팥죽을 쑤어 나누어 먹었다. 그러자 전염병이 크게 유행해 많은 사람들과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었으나 과부의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자랐다. 옛날 스님이 말한 것도 마을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사라졌지만, 그 과부의 아이들이 커서 출가하고 다시 아이를 낳아도 과부는 손자들의 인형을 나무에 매달았고 애동지가 돌아오면 팥죽은 쑤지도 않고 먹지도 않았다. 과부는 죽음에 이르자 자녀들을 모아놓고 자기가 죽은 뒤에라도 치성 드리는 일을 계속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눈을 감았다.

광복이 되어 이곳에 집을 지으려 했으나 공사도중 갖가지 사고가 많아 쉽게 집을 짓지 못하였다. 1957년 조계종에서 성덕사라는 절을 지을 때에도 목재를 나르던 황소가 죽고 인부가 여럿 다치기도 했으나, 절이 건립된 다음부터는 사람들의 불의의 사고로 다치는 일도 없어졌다. 토박이들은 성덕사가 치성을 대신 드려주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연관목차

1094/1461
지략형
과부 지금 읽는 중
해학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