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베이도스의 역사

바베이도스의 역사

가. 식민 시대 이전, 유럽이 만든 무인도

1625년 영국이 바베이도스에 상륙할 당시, 섬은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였다. 하지만 바베이도스가 고대부터 계속 무인도였던 것은 아니다. 바베이도스의 선사 시대 역사는 현재까지 알려진 것이 별로 없지만, 지질 조사를 통해 최초의 원주민들이 기원전 1600년경 남아메리카 대륙 북부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기원후 500~1500년에는 아라와크 족(Arawak)과 카리브 인디언들이 차례대로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바베이도스가 유럽과 처음 접촉한 것은 16세기 초 에스파냐 세력이 섬에 상륙했을 때였다. 이후 16세기 동안 에스파냐가 노예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바베이도스를 침공했는데, 노예가 되기를 거부했던 카리브 인디언들이 섬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면서 섬은 무인도가 되었다. 이후로도 다른 카리브 해 섬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섬의 규모 역시 크지 않아 유럽인들도 점유를 포기하면서, 1625년 영국이 상륙하여 탐험하고, 섬을 잠정적으로 점유할 때까지 무인도 상태가 유지되었다. 1627년 윌리엄앤존(William and John)호가 80명의 영국인과 10명의 아프리카 노예를 섬에 이주시키면서 본격적으로 식민 경영을 시작하였다.

나. 영국 식민 시대, ‘작은 영국’의 시대

바베이도스는 1627년부터 1966년에 독립할 때까지 계속 영국의 식민지 상태를 유지하였다. 이 때문에 바베이도스에는 카리브 해 지역 내에서 가장 영국적인 모습이 많이 남아 있어서 ‘작은 영국(Little England)’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바베이도스는 카리브 해의 가장 동쪽 외곽에 위치하고 있어 북동 방향에서 부는 무역풍의 영향으로 주변 지역에서는 배로 도달하기 어렵기 때문에 다른 카리브 지역 국가들에 비해 침략을 덜 받았다. 따라서 영국의 지배가 오랜 기간 유지될 수 있었다. 바베이도스는 영국의 식민지가 된 지 12년째 되던 해인 1639년 처음으로 의회가 만들어져 현재까지 3세기 이상 지속되고 있다. 초기의 의회는 10에이커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만 참여할 수 있었고, 매년 선거를 실시하였다.

영국인들은 정착 초기에 담배와 면화 재배를 차례로 시도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1640년대 초 네덜란드 인들의 소개로 사탕수수 재배를 시작하면서 바베이도스는 큰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경제는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바베이도스의 숲은 농장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급속히 사라졌다. 대자본이 필요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경제가 발전할수록 소수 백인들의 통제가 강화되었고, 소농들은 설 자리를 잃어 갔다. 1650~1680년에는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3만 명의 주민들이 다른 카리브 국가와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17~18세기에는 사탕수수 재배가 본격화되면서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이 수입되었는데, 1645년 흑인 인구는 약 5,680명에 불과했지만 1667년에는 4만 명 이상으로 증가하였고 노예 해방이 선언되던 1834년에는 그 수가 88,000명에 이르렀다. 노예 무역이 계속되면서 바베이도스는 카리브 해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이 되었고,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아프리카 노예 무역이 이루어진 도시

아프리카 노예 무역이 이루어진 도시 ⓒ 푸른길

18세기 바베이도스의 경제는 다른 섬들에서 설탕이 저렴한 가격으로 대량 공급되면서 설탕 가격이 급락한 데다가, 미국 독립 혁명 기간 동안 영국이 내린 미국 상품의 영국 식민지에 대한 수출 금지조치까지 더해지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 바베이도스는 금수 조치 초기에 식량 부족으로 기아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또한 1780년과 1831년에는 허리케인으로 인해 섬이 황폐화되었으며, 1854년에는 콜레라로 인해 2만 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영국은 바베이도스의 지역 의회가 런던의 통치를 어렵게 한다고 판단하고,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쳐 의회를 폐지하고 다른 카리브 식민지에서 확립한 식민지 정부 체제를 주입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바베이도스는 여러 청원을 통해 지역 의회 체제를 유지하고 더 나아가 설탕세를 폐지하게 하는 등 효과적으로 저항하였다.

다. 근대부터 현대까지

1834년 영국이 노예 해방을 선언하면서 노예들은 도제 체제하에서 출퇴근하게 되었고 4년 후에는 완전히 해방되었지만, 섬에서의 생활은 이전과 똑같은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바베이도스는 거의 300년 동안 선거권을 가진 소수 백인의 손에 맡겨져 있었다. 하지만 1919년 오닐(Charles Duncan O'Neale)을 중심으로 보통 선거권 개혁을 지지하는 민주 연맹(Democratic League)이 조직되고, 1924~1932년 집권에 성공하면서 정치적 민주주의가 확대되었다. 민주연맹은 민주노동당(Democratic Labour Party, DLP)으로 바뀌어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바베이도스의 인구는 1920~1930년에 이르러 급격히 증가하였다. 생활비는 상승했지만 급여 수준은 그대로 유지되고, 세계적 불황이 이어지면서 폭동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1937년에는 폭동으로 인해 14명이 숨지고, 47명이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이 폭동을 계기로 1938년 애덤스(Grantley Adams)가 진보연맹(Barbados Progressive League)으로 알려진 바베이도스노동당(Barbados Labour Party, BLP)을 창설하였다. 옥스퍼드 대학교 출신의 변호사 애덤스는 1940년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42년 회기 동안 투표권의 확대, 직접세의 확대, 근로자 보상 프로그램 확대 등의 투쟁을 이끈 후 1954년에 총리가 되었다. 1958년에는 영국의 카리브 연방 수립 계획에 따라 서인도 연방이 출범하는데, 애덤스는 서인도 연방의 초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애덤스는 1962년 자메이카와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독립으로 서인도 연방이 해체되면서 유일한 총리로 남았다.

1961년 선거에서 설탕 노동자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민주노동당이 집권하면서, 총독의 입법위원회를 총독이 임명하는 상원으로 대체하고, 노동자의 이익 향상과 무상 교육의 확대를 실시하였다. 이와 동시에 영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추진하였는데, 1966년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재집권하면서 바베이도스가 1966년 11월 30일에 독립하였고, 민주노동당의 당수인 배로(Errol Barrow)가 초대 총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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