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키츠 네비스의 역사

세인트키츠 네비스의 역사

가. 고대 - 기록되지 않은 역사

세인트키츠 네비스가 유럽에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다른 카리브 해 섬들과 마찬가지로 1493년 콜럼버스의 제2차 항해를 통해서이다. 콜럼버스가 발견하기 이전까지 수백 년간 이 섬에는 아라와크 족(Arawak)과 카리브 인디언들이 차례로 거주하였는데, 비옥한 화산토로 덮여 있는 이 섬을 ‘비옥한 땅’이라는 뜻의 리아무이가(Liamuiga)라고 불렀으며, 이 이름은 현재 섬의 최고봉에 남아 있다. 네비스 역시 콜럼버스가 발견하기 이전까지 아라와크 어로 ‘달콤한 땅(Dulcina)’이라고 불리기도 하였고, 카리브 어로 ‘아름다운 물의 땅(Oualie)’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의 역사가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다.

콜럼버스는 이 두 섬을 발견하고 세인트크리스토퍼와 네비스라는 이름도 지었지만, 실제 섬에 상륙하지는 않았다. 유럽 인들이 세인트키츠에 처음으로 이주해 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 1623년에 영국인인 토마스 워너 경(Sir Thomas Warner)이 이끄는 무리에 의해서 였으며, 곧이어 프랑스 인들도 진출하였다. 인접한 네비스 역시 몇 년 후인 1628년부터 영국을 비롯한 서구 세력들이 본격적으로 이주하였다.

나. 프랑스와 영국 식민 시대 - 카리브 해 최초의 비에스파냐 식민지, 그리고 ‘피의 역사’

1623년에 영국인들이 이주해 오면서 세인트키츠는 영국의 식민지로 편입되었는데, 이것은 카리브 해 지역에서 에스파냐 이외의 국가가 차지한 최초의 식민지였다. 카리브 해 최초의 영국 식민지라는 점에서 세인트키츠는 ‘어머니 식민지(the mother colony)’ 또는 ‘카리브 해의 요람(cradle)’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영국인의 이주에 이어 프랑스 역시 탐험가 피에르 벨라인 데스남뷕(Pierre Belain d’Esnambuc)의 주도하에 1627년에 처음 세인트키츠에 진출하였으며, 이때부터 서구 세력 간의 각축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17세기 동안 세인트키츠를 손에 넣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였지만, 1713년에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세인트키츠 섬은 영국에 양도되었다. 이후 프랑스의 침략 속에서도 영국이 점유하고 있다가 1783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영국의 식민지로 확정되었다. 이 기간 동안 두 나라가 유일하게 협력한 것이 공동 군대를 만들어서 원주민인 카리브 인디언들을 학살한 것으로, 이 ‘피의 역사’가 끝나고 난 18세기 무렵에는 기존의 카리브 인디언들이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세인트키츠 네비스는 ‘서인도의 지브롤터(Gibraltar)’로 불릴 정도로 카리브 지역의 관문일 뿐만 아니라 높은 생산력을 지닌 사탕수수 재배 지역이기 때문에, 유럽 국가들은 이곳을 손에 넣는 것을 자신들의 힘을 보여 주는 상징으로 인식하였다. 17세기 후반 영국과 프랑스는 섬을 차지하자마자 사탕수수와 담배 재배를 시작하였고,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이주시켜 전형적인 형태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을 형성하였다.

다. 근대부터 현대까지

식민 시기 세인트키츠 네비스는 많은 행정적 변화를 겪게 된다. 1671년에 앵귈라, 앤티가 바부다, 몬트세랫과 함께 '리워드 카리브 제도(Leeward Caribbee Islands Government)'에 속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변화를 겪은 후, 1882년 연방법에 따라 세인트키츠-네비스-앵귈라가 되었다.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만들어졌던 서인도 연방이 해체되면서 1967년 세인트키츠-네비스-앵귈라는 영국에 국방과 외교만을 의존하는 완전한 자치권을 가진 연합주(associated state)가 되었다. 이후 지리적 인접성이나 역사적 연계가 약한 앵귈라가 세인트키츠의 주도 체제에 반발하여, 1967년 독립을 선언한 후 1971년부터 영국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들어갔고, 1980년에는 공식적으로 세인트키츠 네비스에서 분리되었다.

대공황 시기의 설탕 가격 하락은 세인트키츠 네비스에서 노동 운동의 시작을 이끌어 냈다. 1932년 로버트 브래드쇼(Robert Bradshaw)가 조직한 노동자연맹(The Workers League)은 대중의 불만을 등에 업고 1935~1936년 노동자 폭동을 일으켰으며, 1940년에는 세인트키츠 네비스 노동당(St. Kitts and Nevis Labour Party, SKNLP)을 만들어 의회에 진출한 후 30년 이상 정권을 유지하였다. 브래드쇼의 노동당 정부는 국가 통제주의 경제 전략을 펼쳐 1975년에 모든 사탕수수 농장을 국유화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바스테르(Basseterre)의 설탕 공장도 국유화하였다.

하지만 이후 노동당이 지도력의 부재를 드러내자 중산층 중심의 국민행동운동(People's Action Movement, PAM)과 네비스의 분리 독립을 추구하는 네비스 개혁당(Nevis Reformation Party, NRP)이 연합하여 1980년 선거에서 정권 교체를 이루었다. 연합 정부는 초기에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에 반대하였지만, 해외 원조 등 여러 가지 경제적 이익 때문에 완전 독립을 추진하였고, 1983년 9월 19일에 세인트키츠 네비스로 독립을 이루었다. 네비스 개혁당이 연합 정부에 참여하여 자치권을 확대하면서 네비스의 분리 독립 움직임은 어느 정도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1995년 노동당이 다시 집권하게 되면서, 1998년 네비스는 분리 독립에 대한 국민 투표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지 못하여 독립은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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