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후안의 역사

산후안의 역사

가. 에스파냐 식민 시대 – 요새의 건설

푸에르토리코 섬 일대에 처음으로 거주한 부족은 1000년경 정착한 아라와크(Arawak) 인디언의 일족인 타이노 족(Taino)이다. 이들은 부족장을 중심으로 작은 마을을 형성하고 파인애플, 고구마 등의 작물을 재배하였다. 1493년 콜럼버스는 자신의 제2차 항해에서 소앤틸리스 제도의 과들루프(Guadeloupe) 섬에 상륙하였다가, 이 섬의 카리브(Carib) 인디언에게 잡혀 있던 타이노 족 인질들을 풀어주면서 이들을 따라 푸에르토리코 섬에 처음으로 발을 디디게 되었다.

1493년 11월 19일 푸에르토리코 섬의 서해안에 상륙한 콜럼버스는 섬을 산후안 바우티스타(San Juan Bautista)로 명명하고 에스파냐의 영토로 선언하였다. 하지만 이후 15년간 가끔씩 주변을 지나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상륙하는 선박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조치 없이 그냥 방치되어 있었다.

1508년 콜럼버스 탐험대의 일행이기도 했던 에스파냐의 탐험가 후안 폰세 데 레온(Juan Ponce de León)은 섬 전체를 탐사하던 중 북해안에서 훌륭한 항구로 개발할 수 있을 만한 지형을 발견하고 오늘날 산후안 광역 도시권 서부의 과이나보(Guaynabo)에 해당하는 카파라(Caparra)에 에스파냐 정착지를 건설하였다. 이 정착지는 아메리카에서 도미니카 공화국의 산토도밍고(Santo Domingo)에 이어 두 번째로 만들어진 유럽 인들의 정착지이다. 정착지는 1521년에 다시 항구 북쪽 입구의 바위섬으로 옮겨가면서 이름을 푸에르토리코로 변경하였으며, 나중에 섬의 이름과 도시의 이름이 뒤바뀌어 오늘날과 같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16세기 초 산후안은 에스파냐 인들이 신대륙의 새로운 지역으로 탐험을 떠나는 출발 지점이었다. 신대륙에서 다수의 식민지를 확보한 에스파냐는 16세기 중엽부터 신대륙에서 나는 금과 은을 유럽으로 운송하는 데 있어 산후안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멕시코 광산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활용하여 산후안을 군사 기지로 탈바꿈시키기 시작하였다.

원주민과 다른 유럽 국가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1533년부터 대규모의 방어 시설을 건설하였는데, 가장 먼저 건설된 것이 라포르탈레사(La Fortaleza)로 알려진 총독의 방어용 궁전이다. 라포르탈레사는 건설된 이후부터 푸에르토리코 총독의 관저로 이용되었으며, 현재는 푸에르토리코 지사(Governor)의 관저로 사용되고 있다. 뒤를 이어 산후안 만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엘모로(El Morro)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산펠리페델모로 성(Castillo San Felipe del Morro)이 추가로 건설되었다.

산후안 만의 요충지에 건설된 방어 시설은 1595년 드레이크 경(Sir Francis Drake)과 1598년 3대 컴벌랜드 백작(Earl of Cumberland)인 조지 클리퍼드(George Clifford)가 각각 이끈 영국군의 공격을 훌륭히 막아 냈다. 1625년에는 보도인 헨드릭(Bowdoin Hendrik)이 이끄는 네덜란드 병력의 공격으로 마을이 불타기도 했지만, 엘모로를 함락시키는 데는 실패하였다.

에스파냐는 이후 대서양 방향인 북동쪽에 추가로 산크리스토발 요새(Fuerte San Cristóbal)를 건설하였는데, 이것은 에스파냐가 신대륙에서 만든 가장 큰 규모의 요새이다. 또한 1634년부터 1638년까지 도시의 남부 지역을 가로질러 항구와 마주하게 높이 8m, 두께 5m의 성벽을 세웠으며, 1765년부터 1783년까지 망루와 성벽을 대대적으로 추가하면서 도시 전체를 요새화하였다. 산후안은 카리브 해 지역에서 우위를 유지하려는 에스파냐에 의해 군사적 요새로서의 중요성은 점점 더 높아졌지만, 상대적으로 상업이나 농업의 발달은 소홀히 다루어졌다.

나. 근대부터 현대까지 – 요새에서 대도시로

에스파냐-미국 전쟁(Spanish-American War)의 초기인 1898년 5월, 윌리엄 T. 샘슨(William T. Sampson) 장군이 이끄는 미국 해군이 산후안을 공격하고 이에 맞서 산크리스토발 요새의 화포들이 교전을 시작하면서 두 나라 간의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하지만 전쟁은 수개월 만에 미국의 승리로 끝이 났고, 같은 해 12월 푸에르트리코는 파리 조약(Treaty of Paris)에 따라 미국의 영토가 되었다. 푸에르토리코가 미국령이 되면서 이전까지 군사 요충지로서의 의미가 강했던 산후안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미국의 기업들이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 산후안 주변의 농지를 대규모로 사들였고, 사탕수수의 재배가 본격화되면서 수확물의 운송을 위해 산후안 주변의 육상 교통망이 확충되었으며, 산후안 항(Puerto de San Juan)의 상업과 무역 기능이 확대되어 경제 도시로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갖추기 시작하였다.

아프리카 노예 무역이 이루어진 도시

아프리카 노예 무역이 이루어진 도시 ⓒ 푸른길

20세기 들어 푸에르토리코의 이촌향도 현상이 심해지면서 산후안의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었고, 구도심의 성곽 내로 한정되어 있던 도시의 범위는 빠른 속도로 성벽을 넘어 교외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처음에는 성벽이 없이도 상대적으로 안전이 보장되는 남동쪽 내륙 깊숙한 곳의 리오피에드라스(Río Piedras)에 새로운 거주지가 생겨났으며, 주로 해방된 흑인 노예들이 거주하고 있던 구도심과 리오피에드라스 사이의 산투르세(Santurce) 지역을 중심으로 판자촌 형태의 빈민 거주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1951년 산후안은 당시 푸에르토리코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았던 리오피에드라스 전체를 통합하면서 도시 면적은 4배, 인구 규모는 2배로 증가하였다. 1980년까지 산후안의 동서로 인접한 행정 구역까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산후안 광역 도시권은 푸에르토리코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현재는 3분의 2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 20세기 후반부터 구도심의 혼잡에 따른 탈집중화 움직임으로 대부분의 연방 정부 청사와 기관들이 산후안 만 건너편 지역으로 이전하였고, 현재는 지사 관저를 비롯한 일부 기관만 구도심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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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르토리코 산후안의 1월

푸에르토리코 산후안의 1월 겨울, 오후, 맑음. 출처: 포토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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