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맨 제도의 역사

케이맨 제도의 역사

가. 식민 시대 이전 – ‘캐리비언의 해적’과 ‘보물섬’

케이맨 제도가 유럽에 알려지게 된 것은 1503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제4차 항해를 통해서이다. 콜럼버스는 1503년 5월 10일 항해에서 케이맨브랙과 리틀케이맨을 발견하였는데, 그 당시 섬은 사람은 없고 바다거북만이 살고 있는 무인도였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유럽 인들은 섬으로 이주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주로 주변을 지나는 여러 국가의 배들이 먹을거리로 활용할 거북이와 식수를 얻기 위해 잠시 상륙할 뿐이었다.

이후 케이맨브랙은 ‘바다 사람들’로 알려진 해적들이 활동의 근거지로 이용하였다. 당시 케이맨을 중심으로 활동한 해적 중에 가장 유명한 해적은 ‘검은 수염’으로 알려진 에드워드 티치(Edward Teach)였는데, 케이맨브랙에는 검은 수염의 전리품들이 블러프에 있는 여러 동굴 중 하나에 여전히 묻혀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나. 식민 시대

처음에 케이맨 제도는 에스파냐의 관리 아래에 있었지만 1670년 마드리드 조약에 따라 영국에 넘겨졌다. 케이맨 제도에 최초로 주민이 거주한 것은 1661~1671년 자메이카의 거북이 사냥꾼들이 케이맨브랙과 리틀케이맨에 사냥을 하기 위한 기지를 만든 때부터이다. 하지만 에스파냐의 약탈 때문에 자메이카 총독이 이들을 자메이카로 돌아오게 하면서 다시 무인도 상태로 방치되었다. 영국인이 그랜드케이맨을 중심으로 공식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한참 후인 1734년으로, 대부분의 이주민들이 자메이카에서 건너오면서 케이맨은 자메이카의 잠정적인 속령이 되었고, 이후 노예를 이용하여 현재의 정착지를 발전시켰다. 1802년 처음 실시된 센서스에서 그랜드케이맨의 인구 993명 중 노예는 545명에 이르렀다. 1834년 노예 해방 당시에는 950명의 노예가 있었는데, 자유를 찾은 뒤에도 노예들이 대부분 섬에 남으면서 1900년까지 케이맨의 인구는 다섯 배로 증가하였다.

케이맨브랙과 리틀케이맨은 1833년 그랜드케이맨에서 건너간 몇몇 가족이 거주하기 시작하였으며, 1877년까지는 그랜드케이맨과 행정적인 연계를 맺지 않았다.

다. 근대부터 현대까지

케이맨 제도는 스스로도 자메이카의 속령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자치 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은 활발하지 않아서 1831년에서야 비로소 의회가 만들어졌다. 케이맨과 자메이카의 관계는 1863년 영국 의회가 공식적으로 케이맨 제도를 자메이카의 속령으로 규정하기 전까지 공인되지 않은 잠정적 속령이라는 애매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후 케이맨 제도는 1962년에 자메이카가 독립할 때까지 자메이카의 속령으로 남아 있었고, 자메이카의 총독이 섬을 대표하였다. 자메이카가 독립함에 따라 별개의 영국 속령이 되었으며, 별도의 총독이 임명되었다. 1972년에 헌법이 개정되면서 영국으로부터 대부분의 국내 행정에 대한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2002년까지는 영국의 속령(Dependent Territory 또는 Dependency)으로 불렸으나, 의회법이 개정되면서 해외 영토(British Overseas Territory)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주민들에게는 영국 시민권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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