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귈라의 역사

앵귈라의 역사

가. 식민 시대 이전

약 4,000년 전에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건너온 아메리카 인디언(Amerindian)들이 처음으로 앵귈라에 정착해서 농토와 마을을 일구었다. 이들이 3,300년 전까지 살았던 주거의 흔적이 섬 동쪽 끝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언제까지 앵귈라에 거주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이후 태양과 달을 숭배하는 아라와크 족(Arawak)이 남아메리카의 오리노코 강 유역에서 이주해 와서 정착하였는데, 이들은 앵귈라를 화살 모양의 바다뱀이라는 뜻의 ‘malliouhana’라고 불렀다.

나. 식민 시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1493년 제2차 항해에서 앵귈라를 발견했지만, 섬에 상륙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실인지의 여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앵귈라가 처음으로 서양의 기록에 언급된 것은 1564년 프랑스의 역사학자 토마 사우디(Thomas Southey)가 도미니카에서부터 플로리다까지 항해한 후 쓴 『서인도 연대기(Chronological History of the West Indies)』에서이다. 이 시기 유럽 인들은 섬의 이름을 말리우아나(Malliouhana)에서 비슷한 뜻을 가진 에스파냐 어 앵귈라(Anguilla)로 변경하였다.

1650년 세인트키츠에서 건너온 영국의 정착자들로 인해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이후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초기의 영국인들은 앵귈라에서 옥수수와 담배 플랜테이션을 시작하였지만, 1656년 도미니카 카리브 인디언들의 습격 등으로 인해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프랑스 역시 여러 차례 앵귈라를 점유하려고 시도한 끝에 1666년 일시적으로 앵귈라를 차지했지만 브레다 조약에 따라 다시 영국에 양도하였으며, 1745년과 1796년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1800년대까지 앵귈라는 대부분의 주변 카리브 섬들과 마찬가지로 플랜테이션 경제를 유지하였으며,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데려왔다. 담배, 럼, 설탕, 면화, 인디고 등이 이 시기 주요 수출품이었다. 하지만 황폐한 토양과 부족한 강수량으로 인해 농경이 점점 힘들어지면서 플랜테이션의 규모는 지속적으로 축소되었고, 고용은 감소하였다. 플랜테이션 농장의 쇠퇴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소농이 되거나 어부나 선원이 되었는데, 이 때문에 현재까지도 어업이 1차 산업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다. 근대부터 현대까지

영국은 리워드 제도에서 확고한 통제력을 확립한 후에 식민지 체계를 재편하기 시작하였다. 1816년에는 세인트키츠 네비스와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전체를 한 명의 총독이 관할하도록 하였고, 1830년에는 앵귈라를 세인트키츠 네비스와 한 지역으로 묶었다. 하지만 통합된 단위에서 앵귈라는 의회에 단 1명의 대표만을 선출할 수 있었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세인트키츠와 네비스에 비해 소홀하게 취급받으면서 앵귈라 주민들의 불만은 쌓여 갔다.

1950~1960년대에는 서인도 지역의 정치적 지형이 급격하게 변하게 되는데, 앵귈라는 1958년에 새로 만들어진 서인도 연방에 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962년에 서인도 연방이 해체되면서, 세인트키츠-네비스-앵귈라는 여전히 하나의 단위로 묶여 영국의 연합주가 되었다. 영국 법에 따라 연합주의 국방과 외교는 영국이 담당하는 대신에 연합주의 완전한 자치 정부는 인정되는데, 이것은 세인트키츠-네비스-앵귈라가 하나의 자치 정부를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앵귈라는 이전부터 세인트키츠 네비스와 분리되기를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결정은 앵귈라 혁명을 촉발하게 되었다.

사업가이자 앵귈라의 유일한 정당이었던 민중진보당(People's Progressive Party, PPP)의 지도자인 로널드 웹스터(Ronald Webster)의 지도하에, 앵귈라는 세인트키츠의 내부 규칙에 강하게 저항하였다. ‘앵귈라의 날(Anguilla Day)’로 기념하고 있는 1967년 5월 30일, 마침내 앵귈라는 세인트키츠의 경찰력을 섬에서 쫒아내고 자치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6주 후에 실시된 분리 독립에 대한 국민 투표에서는 1,813명의 유권자 중 단 5명만이 분리 독립에 반대하는 압도적인 결과가 나왔고, 자치 위원회는 이에 힘입어 앵귈라의 독립을 선언하고 앵귈라 공화국(Republic of Anguilla)을 수립하였다.

같은 해 12월 영국 정부와 앵귈라 독립 정부는 1년간 임시로 자치 정부를 운영해 본 후 그 결과에 따라 앵귈라의 미래를 결정하기로 잠정적으로 합의하였다. 하지만 1년 후 두 정부는 서로 합의를 이끌어 내는 데에 실패하였고, 1969년 2월 앵귈라는 다시 영국에 대해 일방적으로 2번째 독립 선언을 하였다. 세인트키츠와 앵귈라 간의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영국은 앵귈라에 병력을 투입하여 소요를 제압하였고, 식민지 지위로 다시 돌아가게 해 달라는 앵귈라의 요청을 마지못해 수용하였다.

1971년 영국 의회가 세인트키츠-네비스-앵귈라의 연합 상태를 종료하는 앵귈라 법을 통과시키면서 앵귈라는 마침내 세인트키츠 네비스로부터 분리될 수 있었다. 1980년 12월 19일에는 공식적으로 영국의 독립된 속령이 되었고, 1982년 4월 1일 새 헌법이 발효되었다. 2002년까지는 영국의 속령(Dependent Territory 또는 Dependency)으로 불렸으나, 의회법이 개정되면서 해외 영토(British Overseas Territory)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주민들에게는 영국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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