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나이러의 역사

보나이러의 역사

가. 고대부터 식민 시대까지

보나이러에 최초로 거주한 주민은 기원전 1300년경 베네수엘라에서 건너온 아라와크(Arawak) 인디언의 일족인 카케티오 족(Caquetio)이다. 보나이러라는 지명 역시 카케티오 언어로 ‘좋은 공기’라는 뜻의 ‘Bonay’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후 1499년 에스파냐의 알론소 데 오헤다(Alonso de Ojeda)와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가 섬을 처음 발견하고 에스파냐의 영토로 선언하였다. 1501년 에스파냐는 섬에 처음으로 정착지를 건설하기는 하였지만, 금이 매장되어 있지도 않고 기후 조건 역시 플랜테이션 농업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식민지를 운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20년도 안 되어 에스파냐는 모든 원주민을 현재의 도미니카 공화국과 아이티에 해당하는 히스파니올라(Hispaniola) 섬의 광산 노동자로 끌고 갔고, 보나이러는 1634년 네덜란드의 영토로 편입되기 전까지 무인도로 방치되었다.

1634년 네덜란드는 에스파냐로부터 보나이러를 빼앗았으며, 1636년에는 네덜란드 서인도회사(Dutch West India Company)의 관할로 편입시켰다. 보나이러의 남쪽 지역이 소금 생산에 적합하다는 점을 파악한 네덜란드는 17세기 후반부터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 노동력을 데려와 소금 생산을 시작하였다.

1799년부터 1816년까지 유럽의 정치 지형 변화에 따라 여러 국가들이 점유를 반복하는 혼란의 시대를 거친 후, 보나이러는 1816년 네덜란드 식민지로 확정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나. 근대부터 현대까지

1863년 노예 제도가 폐지되면서 섬의 주력 산업이던 소금 산업이 점점 쇠퇴하여 문을 닫게 되었고, 이후 20세기 중엽까지 보나이러는 비교적 단순하고 조용한 경제와 일상을 유지하였다. 1954년부터는 아루바(Aruba), 퀴라소(Curaçao), 신트마르턴(Sint Maarten), 사바(Saba), 신트외스타티위스(Sint Eustatius)와 함께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전 분야에서 완전한 자치권을 가진 네덜란드령 앤틸리스(Netherlands Antilles)에 속하게 되었다. 1960년대 노동력의 상당 부분을 대체할 수 있는 기계와 신기술이 개발되면서 미국 기업인 카길(Cargill)이 남부의 염전을 인수하여 소금 생산을 재개하였고, 관광업이 활성화되면서 섬의 경제가 점차 살아났다.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보나이러 주민들은 네덜란드 앤틸리스의 수도였던 퀴라소가 여러 측면에서 자신들을 차별하고 있다는 그간의 불만을 표출하였고, 이에 따라 이웃 퀴라소와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다.

이후 네덜란드령 앤틸리스의 존속과 관련해 2006년 실시한 주민 투표에서 독립적인 자치 국가가 된 퀴라소, 신트마르턴과 달리, 보나이러는 퀴라소의 영향에서 벗어나 사바, 신트외스타티위스와 함께 네덜란드의 직접 통치를 받는 것을 선택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2010년 네덜란드 왕국의 특별자치지역(bijzondere gemeenten)이 되었으며, 2011년에는 공식 화폐를 미국 달러(USD, $)로 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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