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령 기아나의 역사

프랑스령 기아나의 역사

가. 고대부터 초기 식민 시대까지

기아나 일대에서 인간이 거주한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기원전 6세기경의 투피과라니 족(Tupi-Guarani)이 최초이다. 기원후 3세기경에는 아라와크(Arawak) 인디언의 한 부족인 팔리쿠르 족(Palikur)이 아마존 유역에서 이주해 와서 기아나의 해안 지역에 정착하였으며, 8세기경에는 이들의 뒤를 이어 카리브(Carib) 인디언이라고도 불리는 칼리나 족(Kali’na)이 거주하였다.

유럽 인들이 기아나로 처음 진출한 것은 16세기의 일로, 1500년 비센테 야녜스 핀손(Vicente Yáñez Pinzón)이 이끄는 에스파냐 탐험대 일행이 기아나의 해안 지역을 최초로 탐험하였다. 이후로 많은 유럽 국가들이 기아나를 식민화하려고 시도하였는데, 가장 먼저 1539년 니콜라 기메스트르(Nicolas Guimestre)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인들을 시작으로, 1562년에는 로버트 베이커(Robert Baker)를 위시한 영국인들, 1568년에는 가스파르드 데 소테예(Gaspard de Sotelle)가 이끄는 에스파냐 인들이 차례로 진출하였다. 하지만 초기의 진출은 정착자들 간의 불화, 원주민과의 갈등, 황열병 등의 풍토병 등이 겹치면서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나. 식민 시대 - 엘도라도를 찾아서

기아나에서 프랑스 정착지의 본격적인 건설은 1637년에서야 이루어졌으며, 1644년부터 1676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공격을 감행했던 네덜란드와 영국이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하였다. 1676년 프랑스의 장 데스트레(Jean d'Estrée) 장군이 네덜란드 인들이 점령하고 있던 카옌(Cayenne)을 되찾으면서 프랑스의 실질적인 지배가 시작되었다. 1699년에는 프랑스와 포르투갈 간에 국경 분쟁이 발생하여 아마존 강의 남동부를 경계로 북쪽 지역이 프랑스의 영토로 정해졌으나,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Treaty of Utrecht)에 따라 국경이 북쪽으로 60㎞ 이동하여 현재의 영토가 확정되었다.

17세기에 유럽 국가들이 기아나로 앞다퉈 진출한 것은 도로가 금으로 포장되어 있고, 주민들이 황금 옷을 두르고 있다는 전설 속 황금의 나라 엘도라도를 찾기 위해서였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게 했던 항해의 목적 중 하나인 황금을 찾으려는 시도는 16세기 잉카 제국의 영토를 거쳐 17세기에는 기아나 고원 일대로 무대가 옮겨졌다. 유럽이 그토록 원하던 엘도라도는 결국 발견되지 않았고, 그로부터 한참 후인 19세기 중엽에야 기아나에서 금의 매장이 확인되었다. 금을 찾아 진출한 유럽 세력은 초기 기아나의 개발에서 많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초기의 정착과 개발은 주로 유럽에서 건너온 3년 계약직의 유럽 인 노동자들이 주도했지만, 이후 빠르게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로 대체되었으며 노예 노동을 이용한 설탕, 향신료, 커피 등의 플랜테이션이 시작되었다.

1809년에는 나폴레옹이 포르투갈을 점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브라질의 포르투갈 인들이 기아나를 점령하여 8년간 통치했다가, 1817년 다시 프랑스에 반환되었다. 1855년 기아나 동부의 아라타예(Arataye)에서 금 매장이 확인되고, 서부의 마로니 강 상류에 있는 이니니(Inini) 지역에서도 금이 채취되면서 기아나에서 다시 한 번 골드 러시가 일어났다. 한 때 기아나에 1만 명 이상이 금을 찾기 위해 몰려들기도 하였다. 또한 기존의 정착자들과 농장의 노동자들도 모두 금을 찾아 나서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진 플랜테이션 농장은 거의 문을 닫게 되었다.

다. 근대부터 현대까지 – 빠삐용과 우주 센터

1852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본토의 툴롱(Toulon), 브레스트(Brest), 로슈포르(Rochefort) 등에 있던 수용소를 폐쇄하고 기아나로 이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조치에 따라 주도인 카옌을 비롯하여 쿠루(Kourou), 살뤼 제도(Salut) 등에 수용소가 건설되었고, 이후 형기가 7년 이상인 죄수 8만 명 이상이 본토에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 주연의 영화 ‘빠삐용’에서 주인공 빠삐용이 수감된 곳도 살뤼 제도에 있는 ‘악마의 섬(Île du Diable)’의 수용소였으며, 드레퓌스 사건으로 유명한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역시 여기에 수감되었다. 1938년 프랑스 정부가 더 이상의 죄수를 수감하지 않기로 결정할 때까지 기아나의 유형지(流刑地)로서의 지위는 90년 가까이 유지되었으며, 기아나 내 여러 곳의 수용소는 1952년에서야 완전히 폐쇄되었다.

1964년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대통령이 알제리의 사하라 기지를 대신하여 쿠루에 새로운 우주 센터를 건립하기로 결정하면서 기아나의 역사와 경제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프랑스 국립우주연구소(CNES)에서 운영하는 기아나 우주센터(Centre Spatial Guyanais, CSG)는 프랑스 최초의 위성 발사 로켓을 비롯하여 300여 개의 각종 우주 실험 장치를 지구 궤도에 진입시켰으며, 이후 다른 기관에 의한 상업적 발사도 많이 이루어져 기아나 경제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1946년 프랑스가 식민지법을 폐지함에 따라 기아나는 프랑스의 지방 행정 구역인 주(département)가 되면서 프랑스와 행정적으로 통합되었으며, 1974년에는 지방(région)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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