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령 버진아일랜드의 역사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의 역사

가. 고대부터 식민시대까지 -‘캐리비언의 해적’과 ‘보물섬’

버진아일랜드에는 유럽 인의 진출 이전에 남아메리카의 오리노코 강 유역에서 이주해 온 아라와크 족(Arawak)과 그 뒤를 이어 카리브 인디언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 인 중에서 섬을 처음 발견한 것은 콜럼버스로, 다른 카리브 해 섬들과 마찬가지로 1493년 2차 항해를 통해 버진아일랜드를 유럽에 소개하였다. 버진아일랜드는 정착 초기 해적들의 소굴로 주로 이용되었는데, 유럽 인 중 처음으로 섬에 정착한 것도 네덜란드 인 해적 요스트 반 딕(Joost van Dyk)이다. 1648년 요스트 반 딕이 토르톨라 섬의 서쪽 끝 소퍼스홀(Soper’s Hole)에 자신의 기지를 세운 이후 네덜란드의 다른 해적들과 프랑스까지 가세하면서 토르톨라의 소퍼스홀이나 노르만 섬(Norman Island)의 바이트(Bight) 만과 같은 곳은 전설적인 해적 소굴이 되었다. 이들의 활동은 나중에 영국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의 소설 『보물섬』에 영감을 주었다.

영국은 1666년에 해적을 비롯한 네덜란드 인들을 내쫓은 다음, 1672년에 버진아일랜드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편입시켰다. 덴마크가 이 기간 동안 오늘날의 미국령 버진아일랜드 지역을 확보하고, 영국은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지역의 지배를 공고히 했다. 그 중간에 있는 세인트존(St. John)은 분쟁 지역으로 남아 있다가 1717년에 이르러서야 덴마크의 관할로 편입되었다. 1680년에는 소수의 농장주들이 앵귈라(Anguilla)에서 버진고르다로 이주해 왔지만, 1717년까지 버진고르다 섬의 인구는 317명, 토르톨라의 인구는 159명에 불과하였다. 이후 18세기에는 주로 아프리카에서 수입된 노예 노동력을 기반으로 사탕수수, 인디고, 해도면(海島綿, sea island cotton) 등의 플랜테이션이 시작되었다. 18세기 초에는 영국 왕실의 승인하에 요스트반다이크를 중심으로 퀘이커교 정착지와 독립된 섬 정부를 만들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1773년 두 번의 청원 끝에 1774년 영국 왕실로부터 행정부와 12명의 선출직 의원으로 구성된 입법 위원회 등의 설립을 승인받아 자치 정부를 수립하였다.

나. 근대부터 현대까지

1871년부터 1956년까지 버진아일랜드는 주변의 영국 식민지 섬들과 함께 리워드 제도 연방(Federal Colony of the Leeward Islands)에 속해 있었다. 1950~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인도 지역의 정치적 지형이 급격하게 변하게 되는데, 1956년 리워드 제도 연방이 해체되고 1960년 총독이 폐지되면서 영국의 직할 식민지(crown colony)가 되었다. 버진아일랜드는 1958년 서인도 연방(West Indies Federation)이 만들어질 때에도 미국령 버진아일랜드와 긴밀한 경제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연방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고 직할 식민지로 계속 남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꾸준히 영국 정부에 자치권의 확대를 요구하여 1949년 다시 자치 정부를 수립하였으며, 1977년과 1994년 헌법 개정에 따라 의회가 확대되고, 더 큰 자치권을 확보하였다. 2002년까지는 영국의 속령(Dependent Territory 또는 Dependency)으로 불렸지만, 의회법이 개정되면서 명칭이 해외 영토(British Overseas Territory)로 변경되었으며, 주민들에게는 영국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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