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바르텔르미의 역사

생바르텔르미의 역사

가. 고대부터 식민 시대까지

1493년 콜럼버스가 자신의 2차 항해에서 생바르텔르미를 발견했을 당시, 주변 지역에는 카리브 인디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정주하기 어려운 지형과 식수의 부족으로 인해 카리브 인디언들은 섬에 정착지를 건설하지는 않은 채 왕래하기만 하였다. 콜럼버스의 발견 이후에도 섬의 규모가 크지 않고 별다른 부존 자원 역시 없었기 때문에 유럽 세력의 관심을 끌지 못한 채 남겨져 있었다.

섬에 처음으로 정착한 유럽 세력은 1648년 자크 장테(Jacques Gente)를 비롯한 프랑스 인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1656년에 섬을 왕래하던 카리브 인디언들에게 살해당하였다. 이로 부터 25년 후에 다시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서 신교도인 위그노(Huguenot)들이 이주해 오면서 프랑스 인들이 이 지역을 계속 점유하게 되었다. 이들은 섬 내에서 거의 불가능한 농업이나 어업 대신 주로 에스파냐 함선을 습격하는 해적 활동을 하였다. 생바르텔르미에는 현재도 이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노르망디 지역의 방언이 남아 있기도 하다.

1651년에 프랑스의 서인도 회사는 섬을 몰타 기사단(Order of Malta, 일명 템플 기사단)에게 양도하였고, 1666년에는 기존의 모든 주민들을 세인트키츠로 내쫓고 새로운 아일랜드 식민지를 수립하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기존 주민들이 다시 복귀하였고, 섬은 제자리를 찾았다. 1674년에 프랑스가 몰타 기사단으로부터 섬을 다시 구입하여 과들루프의 속령으로 편입시켰지만, 어떠한 이익도 창출해 내지 못했기 때문에 생바르텔르미의 점유는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으로 들여왔던 소수의 노예들도 모두 주변 섬으로 옮겨 가면서 카리브에서 흑인 인구가 없는 유일한 섬이 되었다.

1784년에 프랑스 국왕인 루이 16세는 스웨덴 예테보리(Göteborg)에서의 무역 및 창고 사용 권리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생바르텔르미를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3세(Gustav Ⅲ)에게 넘겼다. 카리브에서 식민지를 보유하지 못했던 스웨덴은 생바르텔르미의 항구 지역을 국왕의 이름을 따서 구스타비아로 명명하고, 기반 시설을 정비하여 관세가 면제되는 자유항으로 지정하였다. 스웨덴의 지배하에 식민 전쟁 기간 동안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을 구가하면서 섬의 경제는 활기를 띠게 되었고, 1815년에는 인구가 6,000명까지 증가하였다. 하지만 이후 무역량이 감소하고 질병이 퍼진데다가 1852년에는 대형 화재로 구스타비아가 피해를 입게 되자 스웨덴은 1877년에 섬을 프랑스에 되팔았고, 생바르텔르미는 과들루프의 속령으로 다시 편입되었다.

나. 근대부터 현대까지

섬을 다시 소유한 프랑스는 구스타비아의 자유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이후 섬은 풍족하지는 않지만 평화롭고 조용한 생활을 지속하였다. 주민들은 섬 내에서 산업을 발전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주변 섬에서 경제 활동을 영위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특히 미국령 버진아일랜드(Virgin Islands)의 세인트토머스(St. Thomas)로 많이 진출하였다.

1950년대에 관광객들의 방문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해변과 정숙한 환경 등 관광지로서의 장점이 재발견되었다. 이후 조용한 환경에서 휴양을 원하는 북아메리카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고급 관광지로 자리매김하였다. 2003년 3월에 프랑스의 헌법 개정에 따라 해외 영토의 헌법적 지위가 완전히 변하게 되었는데, 새 법에 따라 프랑스 본토에는 없는 독특한 행정 체계인 해외 자치 지역(collectivité française d'outre-mer)의 지위가 규정되었다. 2003년 12월에 생바르텔르미의 헌법적 지위를 자치 지역으로 변경하는 것에 대한 주민 투표가 실시되었고, 90% 이상의 주민이 찬성하면서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2007년 과들루프 주의 하위 시(commune)에서 해외 자치 지역으로 공식적으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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