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트마르턴의 역사

신트마르턴의 역사

가. 식민 시대 이전

세인트마틴(Saint Martin) 섬에 처음으로 정착한 주민은 기원전 800~300년경 남아메리카의 오리노코(Orinoco) 강 유역에서 이주해 온 아라와크 족(Arawak)으로, 이들은 세인트마틴을 ‘여성의 섬’이라는 뜻의 ‘Oualichi’로 불렀다. 다른 이름으로는 ‘소금의 땅’이라는 뜻의 ‘Sualouiga’로도 불렀는데, 이는 섬에 다수 분포하고 있는 염호(鹽湖) 때문이었다. 아라와크 족의 뒤를 이어 1400년경 호전적인 카리브 인디언들이 이주해 왔으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1493년 섬을 처음 발견할 당시까지 계속 거주하였다.

나. 식민 시대

콜럼버스는 1493년 제2차 항해에서 세인트마틴 섬을 처음 발견하고 에스파냐 영토로 선언하였지만, 실제로 섬에 최초로 진출한 유럽 인은 1631년의 네덜란드 인들이다. 세인트마틴은 브라질의 네덜란드 식민지와 본국을 연결하는 항로상의 경유 지점이었기 때문에, 네덜란드는 식민지 운영에 필요한 천연 소금 저장고로서의 가치를 인식하고 섬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네덜란드가 세인트마틴에 요새를 구축하는 것을 알게 된 에스파냐 군대는 1638년에 다시 섬을 공격하여 손에 넣었지만, 섬의 규모가 너무 작아 곧 관심을 잃고 방치해 두었다. 에스파냐는 결국 1648년 네덜란드와 프랑스에 섬을 내주었고, 두 국가는 조약이 체결된 산 이름을 딴 콩코르디아 조약(Treaty of Concordia)을 맺어 섬을 둘로 나누고 네덜란드가 남쪽을, 프랑스가 북쪽을 차지하였다. 이후 두 국가 간의 마찰로 2세기 동안 경계가 빈번하게 변경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프랑스가 전체 면적의 3분의 2 정도에 해당하는 더 넓은 지역을 차지하였다.

콩코르디아 조약은 2개의 국가와 통합된 섬 모두를 인정했기 때문에 두 국가 사이에는 어떠한 물리적 경계도 만들지 않았으며, 사람과 상품은 두 지역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이 조약은 오늘날까지도 지켜져 세인트마틴은 ‘우호적인 섬(Friendly Island)’이라는 별칭도 얻게 되었다. 이후 영국의 침략이 계속되면서 1648년부터 1816년까지 세인트마틴을 사이에 두고 프랑스와 네덜란드, 영국 간에 7차례나 점유국이 바뀌었다. 최종적으로 생마르탱이 먼저 1816년 파리 조약(Treaty of Paris)에 따라 프랑스령으로 확정되었고, 신트마르턴은 1839년 네덜란드령으로 확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656년 포르투갈에 의해 브라질에서 쫓겨난 네덜란드 인들이 이주해 오면서 사탕수수 재배와 설탕 생산 기술을 가진 이들을 기반으로 경제가 번성하게 되었다. 18세기부터는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수입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18~19세기 동안 면화, 담배, 사탕수수의 재배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1848년 프랑스 지역에서 노예 해방 조치가 실시된 것을 시작으로 1863년에 신트마르턴에서도 노예 해방이 실시되면서 노예 노동력에 기반을 둔 플랜테이션 경제는 급격히 쇠퇴하였다.

다. 근대부터 현대까지

20세기 들어 경제 침체가 지속되면서 1920년대에는 많은 주민들이 석유 회사인 로열더치셸(Royal Dutch Shell)이 석유 정제 시설을 세운 퀴라소(Curaçao)로 일자리를 찾아 이민을 갔으며, 미국령 버진아일랜드(United States Virgin Islands)와 미국 본토로도 다수가 옮겨 가면서 그동안 세인트마틴 섬의 전체 인구가 18%나 감소하기도 하였다. 1939년에는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섬 전체를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 자유항(free port)으로 만들었으며, 신트마르턴과 생마르탱 사이에도 관세와 간접세를 폐지하면서 두 지역 간의 상업적‧경제적 교류의 장애물을 제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는 유럽을 대신하여 미국과의 무역이 확대되었으며, 1943년 미국 해군이 현재 프린세스 줄리아나 국제공항(Princess Juliana International Airport)이 있는 부지를 군사 기지로 개발하면서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높아졌다. 이때부터 섬의 전 지역에서 영어 사용이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신트마르턴에서는 실질적인 공용어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미군이 건설한 활주로를 공항으로 변경하여 미국 관광객을 유치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970년대 이후 관광업이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1954년에 신트마르턴을 포함한 아루바(Aruba), 보나이러(Bonaire), 퀴라소, 신트외스타티위스(Sint Eustatius), 사바(Saba)의 카리브 지역 6개 섬은 ‘네덜란드령 앤틸리스(Netherlands Antilles)’로 묶여 네덜란드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네덜란드령 앤틸리스는 국방과 외교만 네덜란드 정부가 담당할 뿐, 완전한 내적 자치권을 가지는 준국가의 성격을 가졌다. 그러나 1986년 아루바가 네덜란드령 앤틸리스에서 분리 독립한 것을 계기로 신트마르턴에서도 독립운동이 촉발되었으며, 2000년 주민 투표를 통해 네덜란드 왕국 내의 자치 국가가 되기로 결정하였다. 2006년 네덜란드 본토 및 나머지 국가와 합의를 마침에 따라 2010년 네덜란드령 앤틸리스는 해체되었고, 신트마르턴과 퀴라소는 아루바처럼 네덜란드 본토 정부와 동등한 지위를 가지는 네덜란드 왕국 내 자치 국가가 되었다. 신트마르턴 ‘국가’ 정부는 의회 민주주의를 채택하였으며, 초대 총리는 사라 베스코트 빌리암스(Sarah Wescot-Williams)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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