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루바의 역사

아루바의 역사

가. 식민 시대 이전

아루바에 처음으로 주민이 거주한 것은 기원전 1300년경으로, 아라와크(Arawak) 인디언의 한 부족인 카케티오 족(Caquetío)이 베네수엘라에서 건너와 정착하였다. 이들은 아루바의 해안 지역에 소규모 가족 단위로 거주하면서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였고, 토기와 석기 도구를 사용하고 동굴에 벽화를 남겼다.

유럽 인이 아루바에 진출한 것은 에스파냐 인 탐험가 알론소 데 오헤다(Alonso de Ojeda)가 최초이다. 알론소 데 오헤다는 1499년에 아루바를 발견하고 에스파냐의 영토로 선언하였으며, 키가 큰 원주민들을 보고 에스파냐 어로 ‘거인의 섬’이라는 뜻의 ‘라이슬라데로스히간테스(La Isla de Los Gigantes)’로 명명하였다. 그러나 섬에서 금이나 보물 등 유럽 인이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10여 년 후에는 ‘쓸모없는 땅’이라는 뜻의 ‘이슬라이누틸(Isla Inútil)’로 이름이 바뀌었다.

나. 에스파냐와 네덜란드 식민 시대

섬에 유럽 인이 진출한 이후에도 열대 작물 재배에 적합하지 않은 건조한 기후와 자연환경으로 말미암아 유럽 인들의 큰 관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원주민들은 계속 평화롭게 거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1513년 에스파냐가 모든 원주민을 현재의 도미니카 공화국과 아이티에 해당하는 히스파니올라(Hispaniola) 섬의 광산 노동자로 끌고 가면서, 한동안 섬은 주민이 살지 않는 땅으로 버려졌다. 1515년 에스파냐가 섬에 대규모의 말 목장을 조성하면서 끌려갔던 원주민 중 일부와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건너온 인디언들이 목장의 목동으로 고용되었고, 이로써 섬의 북부를 중심으로 다시 소규모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1634년 네덜란드는 남아메리카에서 본토로 운반되는 소금의 운송로를 보호하고 에스파냐를 상대할 해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아루바를 식민지로 삼았으며, 1636년에는 네덜란드 서인도회사(Dutch West India Company)의 관할로 편입시켰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1805년 잠시 영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1816년 네덜란드에 다시 반환되어 계속 네덜란드 영토로 남아 있었다.

다. 근대부터 현대까지

1924년 남부의 신트니콜라스(Sint Nicolaas)에 베네수엘라의 유전에서 생산되는 원유를 정제하기 위한 대규모 정유 시설이 들어서면서, 아루바의 사회와 경제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정유 공장 내의 일자리는 섬의 중산층 형성에 기여하였으며, 신트니콜라스에는 대규모의 노동자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에 공장 시설 자동화가 이루어지면서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아루바 정부는 다시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관광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하였다.

1954년부터는 퀴라소(Curaçao), 보나이러(Bonaire), 신트마르턴(Sint Maarten), 사바(Saba), 신트외스타티위스(Sint Eustatius)와 함께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전 분야에서 완전한 자치권을 가진 네덜란드령 앤틸리스(Netherlands Antilles)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경제와 삶의 질이 급격하게 향상되면서 아루바는 네덜란드령 앤틸리스의 수도 역할을 하던 퀴라소에 정치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민중선거운동(Movimento Electoral di Pueblo)의 주도 아래 정치 체제 개편에 대한 대중 운동이 일어났고, 1986년 네덜란드령 앤틸리스에서 분리 독립하여 완전한 자치권을 가진 네덜란드 왕국 내의 자치 국가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10년간의 과도기를 거친 후 1996년에 네덜란드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계획이 수립되었지만, 경제 침체로 1994년 네덜란드에 완전 독립의 무기한 연기를 요청하였다.

2010년 네덜란드령 앤틸리스가 해체됨에 따라 아루바는 퀴라소, 신트마르턴과 함께 자치 국가가 되었고, 이로써 세 섬은 네덜란드 왕국 내에서 동등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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