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의 역사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의 역사

가. 식민지 이전

유럽 인들이 진출하기 전 세인트빈센트에 처음으로 정착한 이들은 중앙아메리카 일대를 떠돌던 인디언의 한 종족인 시보니 족(Ciboney)이다. 시보니란 아라와크(Arawak) 언어로 돌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석기를 이용하고 조개껍데기로 장식을 만들어 사용할 줄 알았다. 이후 남아메리카의 오리노코 강 유역에서 이주해 온 아라와크 족이 시보니 족을 대신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남아메리카에서 이주해 온 카리브 인디언들이 섬을 차지하였다.

유럽 세력이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을 처음 발견한 시기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는 1498년 1월 22일에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섬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현재도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에서는 이날을 ‘발견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그 날짜에 서인도가 아닌 에스파냐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으며, 세인트빈센트를 방문하였다는 그 어떤 증거도 남아 있지 않다.

17세기에는 기존의 원주민인 카리브 인디언들과 그레나딘 인근에서 난파된 배에서 탈출한 아프리카 흑인들의 혼혈이 생겨나, ‘검은 카리브 인’으로 불리는 가리푸나(Garifuna) 집단이 형성되었다.

나. 식민 시대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에는 원주민인 카리브 인디언과 가리푸나의 저항이 있었기 때문에 1719년에서야 유럽 세력이 진출할 수 있었다. 카리브 인디언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진출 하려는 것을 효과적으로 저지했지만 결국에는 세인트빈센트의 서부 지역에 프랑스 정착지의 건설을 제한적으로 허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더 공격적인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의 도움을 받으려 한 것이었다. 1763년 파리 조약으로 영국이 세인트빈센트의 지배권을 얻게 됐지만 카리브 인디언들은 영국의 통치에 저항하였고, 섬은 1779년에 다시 프랑스에 양도되었다. 18세기 내내 지속된 프랑스와 영국 간의 분쟁으로 1783년에야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서 영국의 식민지로 최종 확정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가리푸나들은 영국의 통치에 저항하며, 1795~1796년에 영국과 전투를 벌였고, 이로 인해 5,000명 이상이 섬에서 추방되어 온두라스로 옮겨 갔다. 섬에 남은 가리푸나들은 내부의 산악 지역으로 도피하였다가 1805년에야 비로소 사면되었다.

그레나딘 제도는 1791년 남북으로 분리되어 그레나다와 세인트빈센트에 각각 편입되었는데, 세인트빈센트가 섬에서 가까운 북부 지역을 통치하게 되어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후 섬의 경제는 노예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 사탕수수, 커피, 면화, 코코아 재배를 중심으로 성장하였으며, 1834년 노예 해방 이후에는 흑인 노동자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포르투갈과 남아시아 노동자들을 끌어오기도 하였다.

다. 근대부터 현대까지

1925년에 입법 위원회가 만들어졌지만,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예의 후손들에게는 선거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1930년대 중엽 대공황으로 촉발된 폭동은 헌법 개헌으로 이어졌고, 1951년에서야 비로소 모든 국민들에게 보통 선거권이 주어졌다. 1958년에는 새로 만들어진 서인도 연방에 속하게 되었으나, 1962년 서인도 연방이 해체됨에 따라 영국에 국방과 외교만 의존하며 완전한 자치권을 지닌 준국가 형태의 연합주(associate state)가 되었다. 1975년부터 서인도 내의 연합주들이 독립을 추진하게 되면서,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 역시 1979년 2월 22일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다.

1979년 독립 후 처음 실시된 선거에서 세인트빈센트 노동당(Saint Vincent Labour Party)이 집권에 성공하였고, 카리브 민족주의자인 밀턴 케이토(Milton Cato)가 초대 총리로 취임하였다. 이후 상대적으로 중도 성향의 국가인 트리니다드 토바고, 바베이도스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979년 수프리에르 화산의 폭발로 농업과 관광업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1980년에는 허리케인 앨런(Allen)으로 바나나 산업에 타격을 입는 등 잦은 자연재해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는 미국 경제의 침체와 파운드화 가치의 하락으로 관광객이 줄어들고, 주력 수출 상품이었던 바나나 수출이 감소하여 경제 침체를 겪었다.

2009년 국가 원수를 영국 국왕이 아닌, 의회에서 선출된 대통령으로 바꾸기 위한 국민 투표를 실시하였으나 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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