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크스 케이커스 제도의 역사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의 역사

가. 식민 시대 이전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에 처음으로 주민이 정착한 것은 A.D. 750년경부터이다. 대앤틸리스 제도 일대에 거주하면서 아라와크 언어를 사용하던 타이노 족(Taino)인 루카얀(Lucayan) 인디언들의 이주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미들케이커스와 그랜드터크를 중심으로 어업과 제염업에 주로 종사하였으며, 약 50가지의 작물을 재배하였다. 하지만 1492년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의 항해를 통해 유럽 세력과 접촉하면서 루카얀 인디언들은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질병과 에스파냐에 의한 노예화로 전멸하게 되었고, 섬은 1512년에 에스파냐의 탐험가인 폰세 데레온(Ponce de Leon)이 발견할 때까지 무인도로 남게 되었다.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가 유럽에 알려진 계기는 1492년 콜럼버스가 그랜드터크 섬의 과나하니(Guanahani) 해변에 상륙한 것이라는 설명이 일반적인 정설이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항해 기록이 분실되고 일부만 복원되면서 진위 여부는 명확하지 않으며, 일부에서는 1512년에 폰세 데레온이 최초로 발견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 식민 시대

콜럼버스의 발견 이후에도 유럽 인들이 섬으로 이주하려는 시도는 없었으며, 이 기간 동안 터크스 케이커스는 주변 해역을 주름잡던 해적들의 은신처로 이용되었다. 해적들은 쿠바, 도미니카 공화국, 중앙아메리카 등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항로 상에서 활동하면서 주로 에스파냐 함선을 공격하였다.

터크스 케이커스에서 주민들의 거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668년 버뮤다의 소금상들이 소금을 생산하기 위해 그랜드터크에 모여들면서부터였다. 이들에게 그랜드터크를 둘러싼 얕은 바다와 내륙의 기수호는 소금을 생산하는 데 이상적인 장소였지만, 곳곳에 있는 산호와 암초는 항해에 장애가 되어 1,000척 이상의 선박이 난파하기도 하였다.

1706년에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버뮤다로부터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를 빼앗았지만, 1710년에 영국이 버뮤다를 대신해 다시 섬을 차지하였다. 한 차례 프랑스가 다시 점유하였으나, 1783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영국의 식민지로 확정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미국 독립 혁명 과정에서 밀려난 왕정주의자들이 프로비덴시알레스와 미들케이커스 등을 중심으로 정착하면서 흑인 노예들을 바탕으로 면화 플랜테이션을 확립하였다. 영국은 1799년에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를 바하마 정부가 관리하도록 편입시켰다.

다. 근대부터 현대까지

1848년에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는 바하마에서 분리되어 1874년까지 지역 대표와 자치 위원회를 수립하였으며, 이후 자메이카의 속령이 되었다. 그 이유는, 영국과 자메이카를 왕래하는 선박들이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를 지나가므로 바하마보다 자메이카가 교신이 쉬웠기 때문이었다. 터크스 케이커스는 1959년까지 공식적으로 자메이카의 속령으로 남아 있었으며, 1962년에 자메이카가 독립할 때까지 자메이카의 총독이 섬을 대표하였다. 자메이카 독립 후에는 별도로 영국의 속령이 되었지만, 1965년부터 1973년까지는 다시 바하마의 총독이 관리하였다.

1973년 바하마의 독립에 따라 비로소 별도의 총독이 임명되었고, 1976년에는 헌법을 제정하였다. 1982년에 영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추진하였지만, 영국의 식민지로 남기를 선호하는 세력이 정권을 차지하면서 그간의 결정을 뒤엎고 영국의 해외 영토로 계속 남게 되었다. 2002년까지는 영국의 속령(Dependent Territory 또는 Dependency)으로 불렸으나, 의회법이 개정되면서 해외 영토(British Overseas Territory)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주민들에게는 영국 시민권이 주어졌다.

터크스 케이커스는 20세기 후반부터 정치 비리로 큰 어려움을 여러 차례 겪었다. 1985년에는 총리와 상업개발부 장관, 입법위원회 의원이 남아메리카의 마약을 미국으로 운반하다가 마이애미에서 미국 마약국(Drug Enforcement Administration, DEA)에 체포되는 대형 마약 스캔들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이듬해인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영국이 자치 정부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직접 관리를 시행하였다. 2009년에도 다시 조직적인 공무원 비리와 무능한 행정 처리들이 드러나면서 총리였던 마이클 마이시크(Michael Misick)가 사임하였고, 영국은 다시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 헌법의 일시적 유예를 선언하고 총독에 의한 직접 통치를 시행하였다. 총독과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 및 영국의 참모들로 이루어진 팀이 꾸려져 과도기적 행정 체계로 정부 개혁을 실시한 후, 2011년 새 헌법을 제정하고 자치 정부를 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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