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라소의 역사

퀴라소의 역사

가. 고대부터 식민 시대까지

퀴라소에 최초로 거주한 주민은 기원전 1300년경 베네수엘라에서 건너온 아라와크(Arawak) 인디언의 일족인 카케티오 족(Caquetío)이다. 이후 1499년 에스파냐의 알론소 데 오헤다(Alonso de Ojeda)와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가 섬을 처음 발견하고 에스파냐의 영토로 선언하였다. 이로부터 20년도 되지 않은 1515년에 에스파냐는 모든 원주민을 현재의 도미니카 공화국과 아이티에 해당하는 히스파니올라(Hispaniola) 섬의 광산 노동자로 끌고 갔다. 에스파냐는 1527년에야 퀴라소에 처음으로 정착지를 건설하였다. 1634년 네덜란드가 전쟁을 통해 에스파냐로부터 퀴라소를 빼앗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Dutch West India Company)의 관할로 편입시켰다. 1659년에는 포르투갈에서 세파르디 유대 인(Sephardic Jews)이 처음으로 건너와 정착지를 형성하였는데, 이때 만들어진 유대 인 거주지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아메리카 전체에서 가장 오래된 유대 인 거주지로 남아 있다.

퀴라소는 식민 시대 네덜란드에 서인도 지역에서 가장 훌륭한 천연항이라는 특별한 이점을 제공하였다. 수도인 빌렘스타트가 위치한 신트안나(Sint Anna) 만에는 산호 군락으로 보호되는 닫힌 형태의 천연 심해항이 있어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의 무역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특히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가장 번성하였던 1660∼1700년까지 퀴라소는 노예 무역의 중심지로서 확고한 지위를 누렸다. 아프리카에서 카리브 해 지역으로 온 노예의 절반은 퀴라소의 노예 시장에서 거래가 되었을 정도였다.

1675년에는 자유무역항(free port)이 되면서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에 개방되어 남아프리카 플랜테이션에서 오는 생산물과 식품의 저장고로 기능하면서 경제적인 번영을 이루었다. 1807년부터 1815년까지 영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1816년 네덜란드에 반환된 이후로 계속 네덜란드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나. 근대부터 현대까지

19세기에 노예 제도가 폐지되자 노예 무역이 중심을 이루던 퀴라소의 경제는 점차 쇠퇴하였다. 무역항 기능이 약화되면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전환한 알로에와 오렌지 농장만이 유일하게 경제를 지탱하는 힘겨운 시기를 보냈다. 이후 1920년대 들어 네덜란드와 영국의 다국적 기업인 로열더치셸(Royal Dutch Shell) 사가 베네수엘라의 유전에서 생산되는 원유를 정제하기 위한 정유 시설과 원유 환적 시설을 스호테핫(Schottegat) 지역에 건설하면서 경제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경제적인 번영과 네덜란드의 정치적 안정이 더해지면서 퀴라소는 카리브 해 일대의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로 성장하였고, 일자리를 찾아 전 세계의 다양한 민족들이 이주해 오면서 50여 개 이상의 민족이 섞여 있는 인종의 용광로(melting pot)가 되었다.

1845년부터 퀴라소는 아루바(Aruba), 보나이러(Bonaire), 신트마르턴(Sint Maarten), 신트외스타티위스(Sint Eustatius), 사바(Saba)와 함께 네덜란드의 카리브 속령 중 하나가 되었고, 1954년에는 6개 섬이 ‘네덜란드령 앤틸리스(Netherlands Antilles)’로 묶여 네덜란드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네덜란드령 앤틸리스는 국방과 외교만 네덜란드 정부가 담당할 뿐 완전한 내적 자치권을 가지는 준국가의 성격을 가졌으며, 빌렘스타트가 수도로 정해지면서 퀴라소는 네덜란드령 앤틸리스의 정치·행정·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2006년 네덜란드 본토 및 나머지 국가와의 합의에 따라 2010년 네덜란드령 앤틸리스는 해체되었고, 퀴라소와 신트마르턴은 1986년 독립한 아루바처럼 네덜란드 본토 정부와 동등한 지위를 가지는 네덜란드 왕국 내 자치 국가가 되었다.

연관목차

1089/1205
40.2 퀴라소의 역사 지금 읽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