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종]일본국 사신이 내조하여 서계를 바치다

[조선 중종]일본국 사신이 내조하여 서계를 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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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사신 일악 동당·요보 서당(堯甫西堂)이 내조(內朝)했는데, 그들의 서계(書啓)는 다음과 같다. ˝일본국 원의청(源義晴)은 조선 국왕 전하(朝鮮國王殿下)께 글을 올립니다. 덕(德)은 음양(陰陽)과 같고 교화(敎化)는 일월(日月)과 같아, 당우(唐虞)와 삼대(三代)처럼 덕으로써 정사를 하시므로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기뻐하고 먼 나라에서도 찾아오게 되었으며, 공맹(孔孟)의 법도대로 나라를 다스려 예(禮)를 세우고 악(樂)을 이루게 되었으니 훌륭하고도 훌륭합니다. 과인(寡人)은 나라에 있어서 비록 마음과 힘을 다해 나라를 다스렸지만 나라를 평치(平治)하지 못했습니다. 지난날에 유관씨(有管氏)가 네 고을을 가지고 반역하여 자칭 네 고을의 장군(將軍)이라고 할 적에 과인이 토벌하려 한 것이 어찌 전쟁을 좋아해서이겠습니까?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비록 네 고을이라고는 하지만 그 크기가 여덟 고을만하니 아, 20여 고을의 군사가 아니고선 공을 이루기 어려웠습니다. 이때에 종성장(宗盛長)은 모든 고을보다 앞서서 충근(忠勤)하려고 하여 의기(義氣)가 사랑스러웠으나, 전서(前書)에 말한 성순(盛順)은 지난 경오년의 한을 품고 재차 귀국(貴國)에서 난을 일으키려 하여, 조카 성장(盛長)이 만류해도 그만두지 않으므로 성장이 과인에게 고해왔었습니다. 고금(古今)에, 인호(隣好)를 닦아오는 나라로서는 차마 볼 수 없는 일이기에, 10개의 섬[島] 군사들에게 명하여 성장과 힘을 합쳐 토벌하게 했었는데, 이에 10개의 섬 및 성장의 군사가 수를 알 수 없이 전사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태평을 구가하게 되었으니, 이는 성장의 공입니다. 지난해에 정사(正使) 태원(太原)·부사(副使) 태숙(台叔)으로 이런 일을 진달(陳達)하게 했었는데, 언어(言語)가 분명치 못하고 정의(情意)가 또한 태만하여 총명(聰明) 에 알려지지 못해서였는지. 일찍이 듣건대, 성순의 죄를 서로가 잊어버리게 된 지 10여 년이라니, 성순의 생사(生死)나 존망(存亡)이 어찌 우리들에게 해롭거나 유익할 것이 있기야 하겠습니까? 그 일이 옳기는 합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성순이 10여 년 뒤에 재차 귀국에서 난을 일으키려 하였으니, 죄를 서로가 잊어버릴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아부(牙符)의 제을(第乙)을 가지고 일악 동당과 부사 요보 서당으로 하여금 재차 진달하도록 한 것입니다. 듣건대, 전일의 도주(島主)들이 선세(先世)에 은덕과 영화 입은 것을 해이(解弛)하지 않았음은 다름아니라 충성이 있었기 때문이요, 성순이 옛 준례를 버리게 되었음은 다름아니라 충성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니, 천리가 그러한 것입니다. 지금 성장이 충근(忠勤)하려 함은 과인이 알고 있는 일이니, 그렇다면 성장에게 전례대로 해주고, 성순에게 하던 전례는 버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상(賞)과 벌은 오직 충성하느냐 충성하지 않느냐에 달린 것이요, 녹(祿)을 받는 것은 공이 있어야 하는 법이니, 성장으로 하여금 동쪽 번병(藩屛)이 되어 더욱 무위(無爲)의 덕화(德化)에 속해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저희 나라와 귀국과의 떨어질 수 없는 맹약(盟約)이 천년만년토록 가게 될 것입니다. 비록 이렇게 말을 하지만, 성장이 만일 충성스럽지 못할 경우에는 반드시 토멸(討滅)해야 합니다. 앞에 말한 유관씨(有管氏)의 반란은 저희 나라로서는 더할 수 없는 불상사로 국가의 허비가 또한 너무도 컸었으니, 조연(助緣)을 받게 되기 바랍니다. 변변치 못한 토산물(土産物)·재화(財貨)를 별지에 갖추어 기록했으니, 빠짐없이 받아주신다면 어느 일이 이보다 다행하리까? 황공하여 다 말하지 못합니다.˝
• 출처 : 『조선왕조실록』 중종 18년 5월 25일(갑오)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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