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인종]송나라 사신의 조서

[고려 인종]송나라 사신의 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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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6년(1128) ○ 송나라에서 형부상서 양응성(楊應誠)과 제주 방어사(濟州防禦使) 한연(韓衍)등을 보내어 왔다. 이보다 먼저, 응성이 벽란정(碧瀾亭)에 이르러 접반소(接伴所)에 공문을 보내었는데, 그 공문에, ˝귀국(貴國)의 예의가 성실하고 두터우므로, 만일 미리 말씀을 드리지 않으면 반드시 쓸데없이 번거로운 수고가 있을까 합니다. 이성(二聖 흠종(欽宗)과 휘종(徽宗))이 먼 곳에 계시므로 신자로서 차마 풍류를 들을 수 없을 것이오니, 조서(詔書)를 맞고 표문(表文)을 드리는 날 이외에는 풍류를 쓰지 마시고, 아울러 의대(衣帶)와 화주(花酒)를 보내는 일도 폐지하여 주십시오˝하였다. 왕이 조서를 수창궁(壽昌宮)에서 맞으니, 그 조서에, ˝나라의 운수가 중간에 미약하여 변경에 변란이 생겼는데, 짐(朕)이 위를 계승하여 바야흐로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노라. 생각컨대, 삼한(三韓)의 옛 땅은 실로 여러 대를 내려오는 친근한 나라라, 지난 번에 사절을 수고롭게 하여 조정에 와서 충성을 나타내었으나 마침내 어려운 고비를 당하여 답례로 보내는 사절이 늦었으니 아마 우리의 사고가 많았음을 생각하여 평소의 마음에 변함이 없을 줄 아노라. 이번에 대금(大金)에 보내는 서한을 ?欲?특히 사절 일행을 보내는데 바다를 건너고 국경을 넘기에 진실로 곤란한 바가 있을 것이나 재난을 구제하고 백성을 진휼하는 데에 반드시 도와 줄 것으로 믿고 약소한 물건을 보내니 평소의 범절에 미치지 못하나 도착되는 데로 받으라˝하였다. 응성 등이 또 차자(箚子)를 드렸는데, 그 차자에,˝옛날 주나라 왕실이 난을 당했을 때에 어떤 사람이 진문공(晉文公)에게 말하기를, 제후(諸侯)의 마음을 얻으려면 왕실에 봉사하는 것만 한일이 없으니 제후들이 그것을 믿을 것이며, 또 크게 의로운 일이라˝하여 진문공은 이미 왕실을 안정시키고 이어 패업(覇業)을 이루었으니 이것이 역사에 실려 영원한 세대까지 빛나고 있읍니다. 사사로이 생각컨대, 귀국이 해동(海東)에서 가장 큰 나라로 알려졌고, 대대로 충순(忠順)함을 나타내어 사절이 왕래한 이후로 우리나라에서 귀국을 대우(待遇)하는데 은혜와 예절이 특별히 두터워 처음부터 조금도 쇠하지 않았읍니다. 요즈음 난국을 당하여 국가에 일이 많더니 뜻밖에 오랑캐가 농간을 부리어 마침내 이성(二聖)이 먼 곳으로 가셨으니, 상하가 근심과 걱정으로 편안히 있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거듭 생각컨대, 귀국은 예의를 지키며 의를 중(重)히 여겼고, 또 우리나라에서 은혜로 대우한 것이 여러 해가 되었으니, 다른 나라와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지금 이런 위급한 일을 당하여 의리상 마땅히 기대하는 바이며, 바로 대의(大義)로써 나라 일에 힘쓸 시기입니다. 지금의 황제(皇帝)가 처음으로 왕위에 올라 사신을 보내어 국왕을 무문(撫問)하시고 나아가서 길을 인도하여 두 분의 황제를 맞아 오도록 부탁한 것은 지난 조서를 받들던 날에도 이미 대강 말씀을 드렸읍니다마는 계속하여 공한으로 거듭 번거롭게 하와 정정과 간절함이 모두 극진하오니 이 뜻을 받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귀국에서 말하기를, ‘금나라로 가는 도로가 험난하여 갈 수 없다’하나 조종(祖宗) 왕 때 금나라의 사람이 귀국의 사자를 따라 입공(入貢)한 적이 있었으니 당시에는 길이 개통되어 있었으며 다닐 수 없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읍니다. 귀국은 또한 금나라의 사람들도 이 길을 통행할까 염려할 듯하나 금나라의 사람이 거란(契丹)을 파한 뒤부터는 모두 하동(河東)과 산북(山北)을 경유하여 사절이 왕래하였으니 반드시 이 길을 통과하지 않을 것이며, 만일 귀국이 금나라의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문제를 일으킬까 염려하겠지만 응성(應誠) 등이 이번에 사절로 오는데 비무장 인원 백 10명으로 다만 국서(國書)와 예물을 가지고 가서 강화를 하려는 것이며, 싸움을 하려는 것이 아니니 귀국에서는 다만 길을 인도하여 사절의 일행(一行)이 국경에 이르러 먼저 금나라 사람에게 보고하여 그 가부(可否)를 듣고 혹 인수(人數)를 줄이라 하면 모든 것을 하자는대로 따를 것이니, 이제부터는 문제가 생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귀국의 길을 통하여 두 분의 황제를 맞아 들인다면 2백 년 동안 충성으로 따르던 의리가 결함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여러 왕이 대우하여 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고, 나라에서 은공을 갚는 것이 과거보다 갑절 더할 것이며, 사방의 모든 나라가 더욱 훌륭한 명성을 우러러 보며 높은 의리에 신복(信服)할 것이니, 실로 무궁한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요, 귀국의 중신(重臣)들도 모두 돕고 받드는 충성을 가질 것이니, 국가에서 포상하는 은전이 영원한 세대에 전할 것이라 일시적으로 남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이용하려는 욕심이 아닙니다.
• 출처 : 《高麗史節要》 권 9 인종 공효대왕 仁宗 恭孝大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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