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종]소세양이 일본 사신들의 입장을 보고하고 홍숙·성운 등이 의논하다

[조선 중종]소세양이 일본 사신들의 입장을 보고하고 홍숙·성운 등이 의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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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 판서 홍숙(洪淑)·참판 성운(成雲)이 선위사(宣慰使) 소세양(蘇世讓)의 보고에 따라 아뢰기를, ˝전일에 의논된 뜻을 잔치 때 이야기하는 기회에 반복해서 객인(客人)들에게 개유(開諭)하니, 상관(上官)이 대답하기를 ‘국왕(國王)이 새로 서매, 새 도주(島主)가 조선을 위해 충성한 그 일을 가지고 청하는데도, 조정이 이전의 약속을 변경할 수 없다하여 딱 잘라 허락하지 않고, 노승(老僧)의 생각을 하나하나 들어 개진(開陳)해도 또한 들어 주려 하지 않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전일에 붕중은 대마도가 반란한 이듬해에 나와서도 오히려 절반만 감한 접대(接待)를 받았는데, 나에게는 이들보다도 달리하여 승락해 주지 않으니 무슨 면목으로 대마도를 지나가고, 국왕에게 돌아가 뵙겠습니까? 국법이 반드시 용서하지 않을 것이므로 여기에 머물러 있겠습니다. 만약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으면 국왕이 반드시 사신을 보내 탐문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소이전(小二殿)의 사송(使送)이 근일에 출발하여 돌아가는데, 우리들의 신서(信書)를 가지고 가면 국왕이 반드시 여기에 머물러 있는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노승의 나이 60이 넘어 죽을 시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떻게 ??사신이 다시 오기를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요사이 조정의 뜻을 보건대 전일처럼 굳이 고집하는 것 같으니 마땅히 내가 알아서 자처(自處) 하겠습니다.’ 하고, 이어 한숨짓다 눈물을 머금으며 오래 혀 차는 소리를 내었습니다. 정관(正官)·도선주(都船主) 이하가 일제히 고(告)하기를 ‘조선이 비록 대마도는 미워할지라도, 특별히 새 국왕을 보아 주지 않을 수 있습니까? 국왕이 성장(盛長)의 보고에 따라 전 도주 및 반란한 무리들을 섬멸한 것은 오로지 조선을 위한 것인데, 지금 반란한 도주를 접대하던 약속만 들어 일체 들어주지 않으니 우리들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상관(上官)이 돌아가더라도 죽게 될 것이므로 사세가 반드시 자진(自盡) 할 것입니다. 상관이 자진한다면 우리들 역시 어찌 살아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장차 모두 자진하게 되면 그런 뒤에야 우리들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했습니다. 조연(助綠)을 전일보다 수량을 증가하여 1천 필(匹)을 보내기로 했다는 일로 말을 하니, 상관이 ‘이전에는 《대장경(大藏經)》을 주고도 1천 필을 주었었는데, 이번에는 본디 3천필을 청하여 3분의 1도 얻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큰 일을 성사하지 못했는데 다소를 어찌 감히 말할 것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특송(特送)과 상관이 있는 곳에 쌀과 베 및 식물(食物)을 특별한 예로 은사(恩賜)한다고 말하니, 상관과 성중(盛重)이 ‘표류(漂流)된 사람들과 적왜(賊倭)를 쇄환(刷還)했으니 은사하는 것은 좋으나 우리들은 이미 맡은 일을 성사하지 못했습니다. 원래 쌀과 베나 식물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조정이 치위관(致慰官)에게 갔다 주게 한다면 될 것이나 우리는 감히 받아가지 않겠습니다.’ 하였습니다. 또 상관·부관(副官)의 방수(房守)들이 ‘이달 26일부터 가지고 있던 장막을 대청(大廳)에다 치고 정관(正官) 등이 종일토록 모여 앉았다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으며, 방수들은 앞의 대청에 숙직(宿直)하고 있는데, 지금은 아무도 장막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서 상관과 부관은 이날부터 먹지 않고 단지 죽만 조금씩 마시고는 누워서 일어나지 않으며 정관(正官) 이하는 칼을 갈아 찼다.’ 했습니다. 또 통사(通事)들을 시켜 자신의 뜻인 것처럼 특송(特送)에게 말하기를 ‘사신 나온 당신들의 일이 이미 완결되었으므로 근간에 전송하는 잔치를 하게 될 것이다.’ 하니 성중의 말이 ‘나는 국왕이 보낸 사신과 같으므로 먼저 돌아갈 수 없다.’ 했습니다. 그러나 왜인(倭人)들은 변사(變詐)가 헤아릴 수 없으므로, 반드시 그런 짓을 하여 우리나라가 그들의 요청을 허락해 주기 바라는 것이고 자진할 리는 만무합니다. 그러나 조급한 마음에 생명을 가볍게 여겨 자진할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니 널리 의논함이 어떠하리까?˝ 하니, 전교하기를, ˝전일에 좌상(左相)이 경연(經筵)에 들어왔을 적에 내가 이르기를 ‘왜인들의 요청이 참으로 곤란한 것과 쉬운 것이 있는데, 만일 일체 <중략>출처 : 『조선왕조실록』 중종 17년 5월 29일(갑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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