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종]동지사 유세린이 북경에서 돌아오니 상이 인견하다

[조선 중종]동지사 유세린이 북경에서 돌아오니 상이 인견하다

분류 교통/통신/지리 > 해양문화사전 > 해양사 > 교류

동지사(冬至使) 유세린(柳世麟)이 북경(北京)에서 돌아왔다. 상이 인견하니, 세린이 아뢰었다. ˝ 《황화집(皇華集)》 은 신이 통사(通事)를 시켜 사사로이 공용경과 오희맹(吳希孟)에게 보내주고자 하였으나,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표계(標契) 가 있어야 한다 하므로 할 수 없이 주사(主司)에게 고하였습니다. 주사가 예부(禮部)에 알리니, 예부는 ˝외국인은 서책을 가지고 사대부의 집을 마음대로 왕래할 수 없다.˝ 하면서 신들에게 ˝주문(奏聞)하고서 전해 주겠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래되어도 주문하지 않기에 신들이 상마연(上馬宴) 때에 글을 올려 다시 청하니 서장을 올려 청하라 하였습니다. 신이 즉시 서장을 올리니, 예부가 서장의 내용이 격식에 맞지 않는다 하여 고쳐 쓰게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입주(入奏)하였는데, 우리나라를 포장하면서 ˝조정의 사명(使命)을 존경하니, 중국을 사모하는 뜻이 지극하다. 서책은 금백(金帛)과는 같지 않으니 전하여 주게 하자.˝고 아뢰니, 황제가 그 주달을 허가하였고 예부가 사람을 시켜 전달해 왔습니다. 11월 18일에 공용경과 오희맹 등이 회동관(會同館)에 이르러 신들을 부르기에 가서 만나본 다음에야 비로소 2인이 모두 그 책을 받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척독(尺牘) 2통을 신에게 주었으니, 곧 전하께 드리는 편지였습니다. 또 들으니, 안남국(安南國)은 그 시조(始祖) 진씨(陳氏)가 영락(永樂) 연간에 그 신하 여결(黎結)에게 찬탈당했는데, 태종 황제(太宗皇帝)가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고 진씨의 후손을 찾아내어 세워주려 하였으나, 모두 여결에게 해를 당하여 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몰락하여 군현(郡縣)이 되었다 합니다. 그후 여씨(黎氏)의 후예가 자립하여 임금이 되어 조공(朝貢)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다시 정토(征討)하지 않고 그대로 세워주었는데, 지금은 막등용(莫登庸)에게 축출당하여 정덕(正德) 11년 부터 조공이 끊겼다 합니다. 병신년 에 그 나라 사신이 여씨의 명을 받들고 내조(來朝)하였는데, 조정(朝廷) 이 오래도록 조공하지 않은 연유를 물으니 ˝막등용이 조공하는 길을 막았기 때문에 내조할 수가 없었고, 지금은 다행히 바다에 떠다니는 상선(商船)을 타고서 오다가 중도에 풍랑에 표류되어 점성국(占城國)에 이른 지 여러해 만에 중국에 도착했다 하였습니다. 조정은 사신을 가두고 문죄(問罪)하는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거역할지 순응할지를 알 수 없었으므로 사신을 안남국 사신과 함께 그 나라에 보내어 거역할지 순응할지를 관찰한 후에 토벌하려고 하였는데 그때 아직 보내지 않았습니다.˝
• 출처 : 『조선왕조실록』 중종 33년 2월 22일(병인)조.

연관목차

791/2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