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충렬]원나라와의 사신교류

[고려 충렬]원나라와의 사신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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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진 6년 ○ 5월에 왜적(倭賊)이 고성(固聲)·칠포(漆浦)에 친입하였으므로, 대장군 한희유(韓希愈)를 보내어 도서(島嶼)를 방수(防守)하게 하고, 또 홀치(忽赤)·순마(巡馬)·여러 영부(領府)의 군사 2백명을 뽑아 경상·전라도에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왜적이 또 합포(合浦)를 침략하니, 대장군 인후와 낭장 지선(池瑄)을 원나라에 보내어 보고하였다. ○ 8월 신묘일에 왕이 상도에 가서 황제를 뵈었다. 이 때 혼도·다구·범문호(范文虎)가 모두 먼저 동정(東征)하는 계획을 받았는데, 다구·혼도는 몽고·고려·한인 군사 4만명을 거느리고 합포를 출발하며, 범문호는 만군(蠻軍) 10만명을 거느리고 강남(江南)을 출발하여, 모두 일기도(一岐島)에서 두 곳 군사가 합쳐서 바로 일본 성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때 왕이 7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아뢰기를, ˝첫째로 탐라(耽羅)에서 진수(鎭戍)하는 우리 군사를 동정하는 군사에 보충할 것, 둘째로 고려인·한인의 군사의 수를 감소하고 도리첩목아(?里帖木兒)를 시켜 몽고군을 더 발하게 할 것, 셋째로 다구의 관직을 더 올리지 말고 성공하기를 기다려서 상을 주며, 또 도리첩목아로 하여금 신과 함께 정동성(征東省)의 사무를 맡도록 할 것, 네째로 소속 군관들에게 패면(牌面)을 하사하여 줄 것, 다섯째로 상국의 연해 지방 사람들도 모두 사공·수부(水夫)에 충당할 것, 여섯째로 안렴사(按廉使)를 보내어 백성들의 고통을 조사할 것, 일곱째로 신이 직접 합포에 가서 군사를 검열하게 할 것˝등이었다. 이에 황제가 이르기를, ˝아뢰는 내용은 이미 다 알았노라˝하였다. ○ 11월에 우승지 조인규(趙仁規)와 대장군 인후(印候)를 원나라에 보내어 글을 중서성에 올려 말하기를, ˝소국에서 이미 병선 9백척과 군사 1만명, 사공·수부 1만 5천명을 준비하였으며, 군량은 중국 석수(石數)로 계산하여 11만석(碩)이요, 기계까지도 모두 준비되었으니, 행여 힘을 다하여 성상의 은덕에 보답할까 하오며, 또 곰곰이 생각하건데, 제후(諸候)로서 중국의 정승이 되는 것은 옛날부터 없었던 예이며, 요(遼)와 금(金) 두 나라 때에도 우리 조상들이 개부의 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습니다. 나도 외람되게 성상의 은덕을 입어 일찌기 특진상주국(特進上柱國)에 임명되었는데, 제후로서 상국 재보(宰輔)의 관직을 가지고 있는 것은 고금에 모두 있었던 일이오니, 잘 아뢰어 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행성(行省)의 군사나 행정에 관한 일을 반드시 우리와 함께 상의하여 실시하며, 사신을 조정에 보내는 데까지도 반드시 우리 사신과 함께 가게 하십시오. 소국이 여러 해 흉년이 들어 백성이 모두 식량이 모자라고, 현재의 군량 7만 7백 27석을 제외하면 공사간에 모두 고갈되어 있는데, 중앙과 지방에서 거두어 들여 대략 4만석을 준비하였으니, 이 이상은 제공하기 어렵습니다. 가만히 계산하니, 1만명의 군사의 한달 식량이 3천석이고, 군사가 3·4만 명에 이른다면 거기에 따르는 활단적(闊端赤)이 역시 적지 않을 것이며, 사공과 수부도 1만 5천명은 될 것입니다. 요즈음 행성(行省)의 공문을 얻어 읽어보니, 명년 5,6월에 배를 출발하려 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매년 5,6월이 되면 흙비[?雨]가 그치지 않고, 조금이라도 서풍이 분다면 바닷길에 안개가 자욱할 터이니, 만일 시일을 지체하여 곧 배를 띄우지 못한다면 군사와 백성이 한꺼번에 양식이 떨어질까 염려됩니다. 만일 미리 말씀을 드리지 아니하여 후에 잘못되는 일이 생긴다면 이해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소방은 지역이 좁고 인구가 희소하여 군사나 백성의 구별이 없는데, 지금 다시 4천 7백명을 뽑는다면, 그 인원을 충당하기 어려울 듯하오니, 탐라(耽羅)의 진수군(鎭戍軍) 1천 명으로 보충하게 하고, 우리나라에는 궁전(弓箭)과 갑주(甲?)가 부족하니, 갑옷 5천 벌, 활 5천 개, 활시위 1만 개를 보내 주시고, 또 병선 9백 척에 필요한 사공과 인부가 1만 8천 명인데, 농민까지 징발하여 겨우 1만 5천 명을 얻었으니, 그 부족되는 3천명은 어디서 추려 내겠습니까. 동녕부(東寧府)에서 관할하는 여러 성이나 동경로(東京路) 연해 지방 주·현에도 사공과 수부가 많사오니, 3천명을 징발해 보내어 이를 보충하게 하여 주시오. 소방의 군관들이 일찌기 진도·탐라·일본을 치는 싸움에서 여러 번 전공(戰功)이 있었으나, 아직도 조정의 상을 받지 못하였으니, 지난번의 공을 추가로 등록하여 김방경을 원수부 구당(勾當)에 참여하게 하며, 박지량(朴之亮)등 10명을 총관(摠管)으로, 조변(趙?)등 10명을 천호(千戶)로, 김천록(金千祿)등 20명을 총파(摠把)로 임명하고, 또 박구(朴球)·김주정(金周鼎)에게는 호두패를 하사하여 앞으로의 충성을 권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하였다.
• 출처 : 『高麗史節要』 권 20 충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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