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종]사신을 인견하고 공물에 표지를 보내는 일과 중국의 상황을 알아보다

[조선 중종]사신을 인견하고 공물에 표지를 보내는 일과 중국의 상황을 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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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사신을 인견하였다. 김익수가 아뢰기를, ˝신들이 지난 3월 7일 옥하관(玉河館)에 이르렀고, 11일 조현(朝見)하고 이어 예부 주객사(禮部主客司)를 배알하니 주사(主事) 노천형(路天亨)이 바로 ˝어제 각로(閣老) 엄숭(嚴嵩)이 내게, 황제가 조선국의 표지(表紙)를 보고 사용하고 싶어한다고 하였다. 돌아가 국왕에게 주달하여 보내게 하라. 그대 나라에서 진헌하는 석자(席子) 는 쓸데가 없으니 이것으로 대? 보내라.˝ 했습니다. 그래서 신이 ˝이 종이는 우리나라에서 상용으로 쓰는 물건이 아니고 단지 사대 문서(事大文書)를 위하여 특별히 만드는 것이므로 매우 큰 공역(功役)이 드는데 어찌 말로 전하에게 주달할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주사가 ˝본국에서 문서를 만들어 외국에다 요구한다면 이것은 청구하는 것과 같으니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3~4일 후 엄 각로가 사람을 보내 ˝내가 사신에게 말할 일이 있으니 조방(朝房)으로 온다면 내가 가서 만나겠다.˝ 하므로 신들이 조방으로 나아갔더니, 바로 한림원(翰林院)의 조방이었습니다. 날이 저물어서 엄 각로가 왔는데, 우리나라 표문(表文)의 부본(副本)과 자문(咨文)을 두세 번 보더니 ˝조선국이 지성껏 사대(事大)하므로 모든 일이 이같이 매우 잘 구비되었다.˝ 하였습니다. 다 본 뒤에는 신들에게 ˝황제가 그대 나라 표지를 보고 매우 쓰고 싶어하니 그대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거든 국왕에게 주달하여 들여보내게 하라. 내가 말한 것과 황제께서 요구하는 일을 굳이 문서에 실을 것까진 없으니 말로 국왕께 주달하여 보내게 하라.˝ 하였습니다. 신이 또 들으니, 황제가 엄 각로에게 ˝조선국이 어떻게 궁액(宮掖)의 변고를 알고 흠문(欽問)하였는가˝?고 물었는데, 엄 각로가 ˝지난해 동지사의 행차 때에 이 뜻을 전했다.˝고 하니, 황제가 기뻐하는 기색을 보였다고 합니다. 과연 다음날 용의 한 벌과 채단·융금 각 네 필씩을 하사하여 국왕에게 전하게 하고 또한 신들을 초청하여 예부(禮部)에 연회를 베풀어주고 시랑(侍郞) 두 사람으로 하여금 정성껏 대우하게 하였습니다. 다만 황제가 염경(念經)하거나 재계할 때는 혹 6~7일이 되도록 전연 조회를 보지 않았습니다.˝ 하고, 정대년(鄭大年)이 아뢰기를, ˝비록 조회를 보지 않더라도 각로를 대내로 불러들여 공사(公事)를 출납한다고 합니다. 또 주사 등이 ˝요구하는 종이는 이번 성절사(聖節使)나 천추사(千秋使)의 행차 때에 반드시 보내라.˝고 하므로, 신들이 ˝이것은 상용하는 종이가 아니라서 만들기가 매우 어려운데 그때까지 어떻게 만들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성절사는 지금 이미 길을 떠나 우리들과는 도중에서 만나게 될 것이니 더욱 안 될 일이다.˝고 하니, 그들이 ˝그렇다면 천천히 동지사든 아무 사신이든 올 때 딸려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을 듣고 기색을 살펴보니 황제가 긴급하게 사용하려는 것이 아니고 우연히 사용하고 싶다는 말을 하자, 각로 등이 그와 같이 말을 전한 것 같았습니다.˝ 하니, 김익수가 아뢰기를, ˝중국 조정의 궁성 밖에 해인사(海印寺)가 있는데 해인사 앞에 서호(西湖)의 물을 끌어대어 큰 연못을 만들었고 황제는 궁성을 헐어서 넓혀 쌓아 그 사찰을 성(城) 안에 들였습니다. 아마도 유연(遊宴)하는 일을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도중에서 큰 목재를 영선(營繕)하여 많이 싣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매우 고된 공역(功役)이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출발할 때쯤 되어 안남국(安南國) 사람이 옥하동관(玉河東館)에 왔는데 그들 사신을 보니 다섯 사람이었고 부관(副官)도 왔었습니다. 또 들으니, 안남국은 처남과 매부(妹夫)가 왕위를 다투어 이윽고 매부가 즉위하였는데 중국 조정에서 그것 때문에 정토(征討)하여 그 본종(本宗)을 세워 도통사(都統使)라고 이름하여 들어오게 하였는데, 사신 관작의 명칭을 모두 중국 조정에서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막등용(莫登庸) 【안남국의 반신(叛臣)임.】 의 죄를 다스리고 나서 그렇게 하였다던가˝? 하니, 김익수가 아뢰었다. ˝자세한 내용은 잘 알 수 없습니다만 저들의 나라가 어지럽게 다투므로 중국 조정에서 정토하고 본종(本宗)을 세웠는데 이번에 온 사신은 그 은혜를 사례하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투느라 북경에 들어가지 못한 지가 이제 6~7년이 되었다 하는데, 그 공헌(貢獻)의 물목(物目)을 보니 방물(方物)의 수가 매우 많았습니다. 혹 황금 향로, 황금 솥도 있었으며, 그중 금(金)의 공헌이 가장 많았고, 다른 궤짝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 출처 : 『조선왕조실록』 중종 38년 6월 10일(계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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