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인조]부산 왜관의 관수 등이 홍희남에게 부산성의 옛터를 되돌려줄 것을 청하다

[조선 인조]부산 왜관의 관수 등이 홍희남에게 부산성의 옛터를 되돌려줄 것을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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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왜관(倭館)의 관수(館守) 등이 홍희남(洪喜男)에게 말하기를, ˝부산성(釜山城)은 옛날부터 왜관이 있었던 곳일 뿐만 아니라, 안팎의 성곽도 바로 왜인이 쌓은 것이니, 그 옛터를 되돌려주는 것이 사리로 보아 당연하다. 더구나 지금 관의 터가 풍수지리상으로 보아 좋지 않으므로, 관을 그곳으로 옮겨 지으려고 한다.˝ 하니, 희남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와 일본이 서로 강화한 지 이미 오래 되어 조금도 불화의 단서가 없었는데, 풍신수길이 우리를 해칠 마음을 품고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군대를 동원하여 난리를 일으켰었다. 그러나 그때 전 도주(島主)가 두 나라 사이에서 애써 주선하여 다시 서로 연합해서 화친하기를 청하였다. 또 우리가 덕천가강(德川家康)과는 본디 은혜도 원한도 없고, 서로 조약을 맺어 화친을 허락한 지가 지금 30여 년이 되었다. 당초에 현소(玄蘇)와 평경직(平景直)이 일시에 나와서, 우리쪽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과 서로 의논하여 땅을 잘 가려 이 관소를 정하였는데, 오늘에 와서 감히 중요한 우리 진영을 빼앗으려고 꾀하니, 그 뜻의 소재를 모르겠다.˝ 하며, 이리저리 다투어 논변하였으나, 그는 끝내 마음을 돌려 수긍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차왜(?? 평성정(平成正)이 우리나라의 서계(書契)를 다시 가지고 와서 홍희남에게 말하기를, ˝서계의 말 뜻은 진실로 매우 마땅하다. 그러나 다만 귀국(貴國)의 국(國) 자와 귀조(貴朝)의 조(朝) 자는 모두 극항(極行) 에 쓰고, 일본(日本)의 일(日) 자와 타국(他國)의 국(國) 자는 평항(平行) 에 썼으니, 우리 대군(大君)이 보면 반드시 성을 낼 것이므로, 부득이 다른 종이에 이를 베껴 써서 먼저 강호(江戶)에 보냈다. 그리고 지금 원래 서계는 다시 귀국으로 돌려보내니, 반드시 이달까지 다시 고쳐 써서 보내야 한다. 그러면 도주(島主)가 8월 사이에 이를 강호에 가져가 바치려고 한다.˝ 하니, 희남이 답하기를, ˝아국의 국(國) 자와 일본국의 대군(大君) 글자는 극항에 썼고, 조선국 예조 참의(朝鮮國禮曹參議) 글자와 일본국 대마도 태수(日本國對馬島太守) 글자를 평항에 쓴 것은 곧 체면을 중히 여기고 존비를 구별한 것이다. 두 나라 사이에 통하는 서계에 대해서는 서식(書式)이 정해진 지 이미 오래인데, 지금 갑자기 망령되이 서식을 고칠 것을 청하는 것은 진실로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타국의 서계에 대해서는 사체가 매우 중한 것인데, 어찌 감히 제마음대로 이래라저래라 하며 오래도록 지체해 두고 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드디어 그와 서로 다투어 힐난하였는데, 그는 끝내 희남의 말을 주의하여 듣지 않았다. 감사가 이 사실을 갖추 써서 아뢰었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부산성으로 왜관을 옮기는 일은 결코 따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국(國)·조(朝) 등자의 높낮이에 대해서는 이것이 바로 종전부터 예조에서 그들에게 보내던 답서의 격례(格例)인데, 이제 와서 고치기를 청하는 것은 더욱 해괴한 일이니, 그들이 알아듣도록 잘 타이르게 해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왜관을 옮기는 일에 대해서는 아뢴 대로 하라. 국자를 고쳐 써달라는 청은 근거가 없지 않다. 일본 등의 글자를 아국의 국자와 같은 격식으로 쓰는 것도 혹 무방할 듯하다.˝ 하였다. 이리하여 일체 성정(成正)의 말에 따라 고쳐 써서 주었다.
• 출처 : 『조선왕조실록』 인조 22년 7월 12일(정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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