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인조]통신사 윤순지 등을 인견하고 일본의 사정에 대해 묻다

[조선 인조]통신사 윤순지 등을 인견하고 일본의 사정에 대해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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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통신사(通信使) 윤순지(尹順之), 부사 조경(趙絅), 종사관 신유(申濡) 등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일본의 사정은 어떠하던가˝? 하니, 순지가 아뢰기를, ˝관백(關白)이 3대를 이어오면서 그럭저럭 무사하기를 바라고 있으므로 우려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그 나라는 일찍이 할아버지와 아들, 손자가 서로 계승한 때가 없었던가˝? 하니, 순지가 아뢰기를,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그 나라는 강토가 비좁은 것이 아닌데도 땅이 수용할 수 있는 한도보다 인민들이 갑절이나 많습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사람은 많고 땅이 좁으면 백성이 반드시 빌어 먹는 자가 많을 것이다.˝ 하니, 순지가 아뢰기를, ˝연로에서 보니 쌀로 밥을 짓는 자가 없고 가마를 매는 왜인까지도 하루종일 먹는 것이란 삶은 토란 서너 개뿐이었습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육지에 내린 뒤에 강호(江戶)까지는 며칠 길인가˝? 하니, 순지가 아뢰기를, ˝약 15일 길을 갔습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지나는 곳에 마을은 많던가˝? 하니, 순지가 아뢰기를, ˝높은 산꼭대기라도 다 빽빽이 깔려 있었으며 소위 작은 마을이란 것도 우리나라의 큰 고을보다 번화하였습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관백이 무비(武備)를 중단하고 문교(文敎)를 닦는 것으로 일삼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니, 순지가 아뢰기를, ˝나라에서 포를 쏘는 것을 금한 지가 이미 30여 년이 가깝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들이 갔다가 돌아오는 6개월 동안에 전혀 포성을 듣지 못했으니, 무비를 중단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닌 듯합니다.˝ 하고, 조경이 아뢰기를, ˝3, 4세의 아이들도 다 칼을 찬 것을 보면 완전히 무비를 중단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관백이 관례적으로 1년에 한 번 황제를 조알(朝謁)하는데 그 중간에 40여 리 가량 되는 하나의 높은 재가 있어 계곡이 뒤엉켜 감돌고 숲이 울창하기 때문에 조알할 때마다 반드시 호위병을 많이 데리고 갔으나, 이제는 의심하는 정도가 심해져서 조알하는 예까지 폐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호(江戶)에 있는 군병은 그 수효가 얼마나 되던가˝? 하니, 함께 대답하기를, ˝관백의 군병은 50만 명이고 제장(諸將)의 군병은 80만 명이라고 하였으나, 그 급료(給料)의 액수를 들어보면 거의 5, 6백만 명에 이릅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강호에도 성을 쌓고 호(濠) 를 팠던가˝? 하니, 순지와 경이 아뢰기를, ˝세 겹의 성을 쌓고 두 겹의 호를 둘렀는데, 모두 큰 전함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고, 경이 아뢰기를, ˝그 지방에는 돌이 없어 성을 쌓은 돌은 다 축전주(筑前州)에서 운반해 왔는데 강호까지의 거리가 2천 리라고 하였으니, 왜인의 물력이 풍부한 것을 이에 의해 알 만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백은 어떤 사람이던가˝? 하니, 순지가 아뢰기를, ˝그 체구는 작으나 눈동자가 부리부리한 봉목(蜂目) 으로 매우 정채가 있었습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관백이 입은 복색은 어떤 모습이던가˝? 하니, 순지가 아뢰기를, ˝흑색의 복장이고 옷은 우리나라 단령(團領)의 제도와 같았는데 두 어깨에 모두 금물로 해와 달 같은 형상을 발랐으며 작은 모자를 머리에 쓰고 있었습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관백도 칼을 찼던가˝? 하니, 순지가 아뢰기를, ˝그 풍속이 진(奏)나라 법을 모방하여 전상(殿上)에 모시는 자는 칼을 차지 못하고 관백 좌우의 두 사람만이 칼을 가지고 시립(侍立)하였습니다.˝ 하고, 조경이 아뢰기를, ˝대마 도주(對馬島主)는 대대로 28대를 물려오면서 문벌이 가장 창성하여 우리나라의 일을 전담하고 있는데, 의성(義成)은 사람됨이 매우 교활하여 항상 우리나라를 공갈하고 관백에게 아부하는 것으로 능사를 삼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전에 임광 등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왜인이 그에게 황금을 주자 임광이 받지 않으니, 왜인이 억지로 권하므로 임광이 받아서 바다에 던져버린 적이 있었다. 이번에 순지와 조경 등이 돌아올 때는 왜인이 사신을 호위하는 차인(差人)으로 하여금 남몰래 황금 60 냥을 싸가지고 부산에 당도하여 비로소 순지 등에게 건네주게 하였다. 이는 대개 사신이 또다시 금을 던져버리는 일이 있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예조가 말하기를, ˝그것을 받으면 사신의 체모에 손상이 되고 받지 않으면 왜국인이 실망할 것이니, 부산에 유치하여 국가의 용도로 쓰고 내년에 공무목(公貿木)으로 그 값을 헤아려 지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출처 : 『조선왕조실록』 인조 21년 11월 21일(신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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