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인종]여진의 침입과 송나라 사신의 조서

[고려 인종]여진의 침입과 송나라 사신의 조서

분류 교통/통신/지리 > 해양문화사전 > 해양사 > 교류

계묘 원년(1123) ○ 6월에 동남해도부서사(東南海都部署使) 박경린(朴景麟)이, 여진의 병선(兵船) 30척이 국경을 침범한다고 오보(誤報)하여, 병마판관(兵馬判官) 양제보(陽齊寶) 등을 원병(援兵)으로 보내어 방어하게 하였는데, 경주까지 갔으나 적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송나라에서 예부시랑 노윤적(路允迪)과 중서사인(中書舍人) 부묵경(傅?卿)을 보내 왔다. 조서에, ˝멀리서 들으니 나라를 이어받아 곧 정책을 경건히 마련한다고 한다. 생각하건대, 처음으로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니, 승통(承統)하는 기대에 맞도록 노력할 것이다. 졸지에 상사를 당하여 슬픔이 매우 심할 듯하기에, 급히 사신을 보내어 어진 사람을 높이는 은총을 전하고, 물품을 풍부히 보내어서 아울러 애도함과 영광의 뜻을 표하노니, 마땅히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고 영원히 제후로서의 도리를 준수하라. 이제 별지에 적은 대로 경(卿)에게 예물을 갖추어 내리노라˝하였다. 왕이 혼당(魂堂)에서 제전(祭奠)과 조위(弔慰)하는 조서(詔書)를 받았다. 노윤적(路允迪)등이 왕에게 고하기를, ˝<우리나라> 황제(皇帝)께서, 귀국의 선왕이 돌아가시고 뒤를 이은 왕이 왕업을 계승하였음을 듣고, 사신을 시켜 제물을 보냈는? 조위하는 조서와 제문은 모두 손수 지으신 글월입니다. 원풍(元豊, 송나라 신종(神宗)의 연호)연간의 제전이나 조위는 상례(常例)에 의하였을 뿐이었지만, 이번에는 은총(恩寵)과 예우(禮遇)가 매우 달라서, 특히 부자(父)간의 은총을 베푼 것입니다. 대관(大觀, 송나라 휘종(徽宗)의 호)연간에 내린 조서에는 특히 「권」(權)자를 없애어 진정한 왕이라는 예의를 나타내었고, 이번 황제의 글월에서도 또한 특별한 은총을 보인 것입니다. 다만 선왕께서는 요(遼)의 책명(冊命)을 받았으므로 휘(諱)를 피하여 왔으나, 이제는 요의 책봉이 없어졌으니 조정에 <책봉하기를> 청하십시오˝하니, 왕이 답하기를, ˝우리나라가 조종(祖宗)이래로 즐겨 중국의 풍속을 사모하였는데, 특히 선고(先考)는 예(禮)로써 대국을 섬기며, 충성으로써 직무를 보살펴, 비록 해외에 있으나 마음은 항상 왕실에 있었으니, 천자가 환하게 아시고 여러 번 은총과 혜택을 베풀었사온데, 이번에 또 친히 제문을 지어 특별한 은총을 표하였고, 신의 직함(職啣)에서 「권」자를 뺐습니다. 비록 선고(先考)께서는 일찍이 이런 예우(禮遇)를 받았으나, 소자(小子)가 어찌 이런 예우를 감당하겠습니까? 그리고, 이른바 책명은 천자가 제후(諸侯)를 포상(褒賞)하는 큰 예전(禮典)인데, 이제 상사(喪事)도 마치지 못하고서 서둘러 큰 예전을 요청하는 것은 도의상 미안한 일로, 실로 황송하고 부끄러움만 더할 뿐입니다. 내년에 사신을 보내어 사은(謝恩)과 아울러 적은 정성을 전달하고자 하오니, 바라건대 당신들이 잘 아뢰어 주기를 바라오˝하였다.
• 출처 : 《高麗史節要》 권 9 인종 공효대왕 仁宗 恭孝大王

연관목차

734/2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