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왕의 인연설화

장수왕의 인연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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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 인연
• 국가 : 인도
• 참고문헌 : 장수왕본생경

부처님은 어느 날 패싸움을 하고 있는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옛날 구살라국에 장수왕이란 임금이 있었다.
매우 마음이 어질어 오로지 자비와 인의로써 선정을 베풀어 나라는 평안하고 백성은 번영하여 위아래가 한결같이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그 때 이웃 가사국에는 범예왕이 있었는데 몹시 간탄하여 간악한 정치를 베풀었으므로 국운은 날로 피패하고 백성들은 슬픔에 젖어 있었다.
그래 그는 자기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이웃나라 구살라국을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여 틈만 있으면 언제고 공격하여 국토와 재산을 빼앗으려 꿈꾸고 있었다.
왕은 생각했다.
「언제고 저 나라가 약해지기를 기다리다가는 이 몸이 죽어 다른 몸을 얻더라도 어려운 일이다.
죽든지 살든지 한번 겨루어 보리라.」
하고 곧 군대를 동원했다. 그러나 장군들은 반대했다.
「군대는 있으나 군비가 없고 적은 적으나 지용(智勇)이 뛰어나 있습니다.
전쟁이란 반드시 어떤 조건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를 쳐들어간다면 하늘을 욕하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나라에는 많은 국토와 인민과 재산이있다. 군비는 그것을 빼앗으면 되고 또 그것이 곧 전쟁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장수왕은 마음씨가 곱고 천성이 어질어 사람의 죄를 보고도 오히려 사랑으로 교회(敎悔)하는 사람이니 설사 우리가 진다하더라도 우리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일시에 대군을 거느리고 구살라국을 쳐들어갔다.
그러나 워낙 단결이 굳은 구살라군은 처음에는 약간 쫓겨가는 듯하였으나 마침내 그들은 가사군을 역습하여 범예왕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러나 원래 자비심이 많은 장수장인지라 무참하게도 학살하는 것을 차마 하지 못하였다.
「네가 살고 죽는 것은 오직 우리의 마음 가운데 있다. 그러나 이번만은 용서해 줄터이니 다시는 이런 일을 범하지 말라. 땅이 많아졌다고 그대의 배가 더 불러지고, 재산이 더 높아진다고 그대의 이름이 더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대 먹는 것같이, 그대 입는 것같이 그대 사는 것같이 모든 백성이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선정을 베풀라. 그리하면 그대는 결국 죽지 않으리라.」
그러나 간악한 범예왕은 이 간절한 장수왕의 인혜(仁惠)에도 불구하고 얼마 아니되어 또 군대를 몰고 구살라국을 쳐들어왔다.
장수왕은 생각했다.
「나는 이미 범예왕을 이기고 있다. 그러므로 저들의 습격에는 조금도 개의할 필요가 없다.
범예가 바라는 것은 이 땅과 재산이다. 설사 전쟁을 하여 저를 이긴다 하더라도 저가 이를 얻지 못하면 전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아 저와 나 사이에서 무고한 고통을 당하는 것은 오직 두 나라 백성들뿐이다.
차라리 내가 거리의 걸사(乞士)가 되어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을 하지 않으리라.」 하고 몰래 왕비와 같이 왕궁을 벗어나 이름을 갈고 모양을 바꾸어 바라나의 시중에 숨었다.
이렇게 해서 범예왕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구살라국과 그 재산을 손아귀에 넣고 한 없이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않고 다시 마음만 불안해졌다.
「그들이 어디로 갔을까? 언제 어떻게 공격해 올지 모른다. 그들을 잡아 죽이기 전에는 내가 다리를 편히 뻗고 잠을 이를 수 없다.」
하고 밤낮 고민해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장수왕은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할 뿐 다른 생각이 없었고, 혹 시간이 나면 청아한 음율로 기악을 연주하여 온 인류의 평화를 빌었다.
그러는 동안 시민들은 그가 장수왕인 줄 모르고 크게 덕을 흠모하여 국사, 브라만들은 특히 그를 청해 보살펴 주었다.
이러는 가운데 왕비는 옥동자를 분만하여 이름을 장생태자(長生太子)라 하고 가만히 이웃 나라에 보내 양육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장수왕은 수색의 대상이 된지 십수년, 하루는 길가 나무 밑에 앉아 음율을 고르고 있는데 어떤 거지가 와 곁에 앉았다.
「어디서 어디로 가는 길손입니까?」
「예, 저는 저 머나먼 나라에서 장수왕의 높은 이름을 듣고 왔는데 왕은 간 곳이 없고 폭군이 노략하여 가겼던 재산은 다 빼앗기고 이렇게 거지가 되어 돌아다닙니다.」
아, 참으로 가엾은 일이었다.
무쟁(無爭)의 평화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왔지만 또 자기 때문에 재산을 빼앗기고 천애의 거지가 되어 있는 사람이 있으니―장수왕은 생각했다.
「나로 인해 거지가 되어 있는 저 백성을 그대로 놓아둘 수는 없다. 내 몸을 죽여서라도 저 몸의 살 곳을 마련해 주리라.」
이렇게 생각한 장수왕은 거지에게 말했다.
「내가 장수왕이오」
「예? 당신이 장수왕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아, 참으로 세상은 알고도 모를 일입니다.
그토록 어질고 착하신 대왕님이 이런모 습을 하고 이런 자리에 앉아 계시다니―」
걸인은 소리 내어 울었다.
「조용히 하십시오. 누가 알면 큰일납니다. 나는 오늘 당신이 이렇게 올 것을 알고 있었고,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이 목숨을 버릴 것인가? 이것은 그동안 나에게 큰 숙제였습니다.
그러나 때는 그렇게 쉽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범예왕은 지금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장장한 상금을 걸고 탐색하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나를 인도하여 범예왕의 처소에 이르게 된다면 당신은 금후 그로 인하여 편히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대왕님, 꿈에라도 그런 말씀을 마십시오.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바로 대왕님입니다.
저는 아직 젊고 대왕님은 이미 늙었습니다.
이제 제가 밭을 빌어 생을 이어가도록 할 터이니 대왕님께서는 편히앉아 계십시오.」
「아니오. 당신은 사람의 명이 때가 있음을 알지 못하십니다.
아무리 단 것을 먹여 주린 창자를 위로하고 부드러운 옷을 입혀 사람이 기를지라도 명은 마침내 마침이 있습니다. 나의 명은 당신이 아니라도 며칠가지 못할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의미 없이 죽어 썩는 송장이 되기보다는 황금의 일토배가 되는 것이 낫지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진실로 대왕님께서 그런 마음을 가지신다면 저는 차라리 먼저 대왕님 앞에서 죽고 말겠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 목숨을 유지하는 것도 옳지 못한 일이거니와 사람을 잡아 상금을 탄다는 것도 이치에 닿지 않음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차피 죽을 몸, 인정도 사정도 없는 무지한 백성의 손에 잡혀 허깨비와 같은 죽음을 당하는 것보다는 나를 그리워하고 진리를 사모하여 덕을 추앙하던 내 사랑하는 백성을 위해서 이 몸을 버린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겠습니까?」
「대왕의 뜻은 십분 이해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대왕님을 뵙는 순간 그리웠던 모든 마음은 가을하늘에 구름 걷히듯 하였고, 처자를 생각하는 마음도 재산을 그리워하는 생각도 모두 다 바람처럼 사라져가고 이제 나는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저의 소망은 모두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약한 힘이나마 본국으로 돌아가 내 나라의 어진 임금님을 충성으로 섬겨서 대왕님의 높은 덕을 온 누리에 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그는 간절히 고하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나 장수왕은 그를 놓지 않았다.
「당신이 정 그러신다면 나를 인도한 보수로 받은 상금을 불쌍하고 가련한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어 나의 이 허망한 목숨이 값어치 있게 버려지도록 하여 주십시오.」
「대왕님―」
거지는 대왕님의 손을 잡고 엎드려 울었다.
「여보시오, 도사(導師)님. 만일 당신이 이렇게 소란을 피운다면 좋은 씨앗이 맺기 전에 무서운 풍운이 내릴까 두렵습니다. 어서 울음을 그치고 나를 인도하시오.」
이렇게 해서 왕은 걸인의 손목을 잡고 범예왕 앞에 인도되었다.
범예왕은 살기에 찬 눈빛으로 장수왕을 바라보면서,
「내 오늘에야 비로소 발을 뻗고 자게 되었다. 참으로 착하다, 거리의 천사여. 내 너에게 평생을 먹고 살 상금을 줄터이니 마음껏 즐기고 마음껏 향락하라.」
천사는 주먹 같을 눈물을 발에 떨구면서 장수왕의 발에 엎드려 정례했다.
범예왕은 곧 군신에게 명령하여 장수왕을 결박하고 시가지를 돌아다니며 조리를 돌리게 했다.
「내가 나라를 빼앗긴 자입니다. 임금님의 마음을 괴롭게 한 자입니다.」
이런 프랑 카드를 가슴에 붙이고 그 때 장수왕의 아들 장생태자는 외국에 들어가 비밀히 양육되어 나이 17세에 이르렀고 그동안 무용을 익혀 지혜가 뛰어난 청년이 되어 있었다.
나라를 사모하고 부모를 그리워하는 정은 날로 강해져서 견디다 못해 몇몇 부하를 이끌고 구살라국에 밀입하여 기회만 노리고 었던 참이었다.
그 때 장수왕이 어떤 천사의 무고로 범예왕에게 붙들려 조리를 돌리고 마침내 사형에 임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눈에서 무서운 불길이 솟아올랐다.
「범예왕 이놈, 두고 보자. 결코 내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리라.」
범예왕이 아버지 장수왕을 조리돌리고 형틀에 묶여 불 질러 죽이려 할 때 장생태자는 브라만의 옷을 입고 범예왕 앞에 나아가,
「저는 대대로 장수왕과 원수의 인을 맺어온 사람입니다. 내 저자가 죽음에 이르기 전에 그의 일가친척을 물어 3족을 멸하려하니 원컨대 면회를 허락해 주십시오.」
「장하다. 용감한 청년이여, 내 너를 위해 허락하겠거니와 장차 너는 나를 위해 충성을 다하라.」
이렇게 하여 장생태자는 죽음 일보 전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 얼마나 괴로우십니까?」
「장하다. 내 아들아, 내 너를 잊은 날이 하루도 없었노라. 하늘이 무심치 않았구나.
그러나 너는 나에 대한 생각일랑 조금도 하지 말라.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다하여라.」
「아버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 날칼로저 요망한 범예왕을 죽이고 아버지를 구제하겠습니다.」
「아니다. 태자여, 꿈에라도 그런 생각은가지지 말라. 원을 원으로써 갚으면 마침내 원은 쉬어지지 않는다. 만일 네가 범예왕을 해하여 피를 보는 날이면 내가 처음 왕위를 버리고 시중에 은거한 것부터가 잘못이 된다. 오직 참고 견디는 것이 영원한 평화의 사도가 된다.」
「그러나 아버지, 어떻게 저의 눈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볼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니다. 나는 그렇지 않아도 갈 때가 다된 사람, 스스로 명에 임해 죽음을 얻고 단을 모아 화장을 하는 것이니 때를 다해 사람을 구하는 원수의 타는 목을 축이고 죽는 것이나 무엇이 다를게 있겠느냐?
네가 진정 내 아들이라면 후에라도 그런 일일랑 생각하지 말라.
만일 내가 죽은 뒤에라도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이렇게 간절히, 그는 그의 아들에게 유언을 남기고 불쌍하게도 슬프게도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태자와 그 가련한 천사는 대왕의 죽음을 보고 까무러치다가 다시 일어나 대왕의 은덕을 마음속 깊이 추모하면서 꼭 그와 같이 살아갈 것을 다짐하였다.
범예왕은 장수왕을 잡아 죽여 한편 마음이 편안하였으나, 그의 아들 장생태자가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 또 다시 마음이 그를 향해갔다.
「여봐라. 나에게 또 한 가지 근심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장생태자다.
그 놈이 외국에서 자라 지금 이 나라에 밀입하여 나의 목을 노리고 있다 하니, 너희들은 다시 방을 써 붙여 어떻게 해서라도 그 놈을 잡아오너라.」
그러나 서민들은 그의 모습은 물론, 그의 나이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지라 그의 행적을 찾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편 태자는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시중에 숨어 아버지와 같이 학문에만 열중하면서 틈틈이 아름다운 기악으로 시민들의 거치러진 마음을 달래주곤 하였다.
이렇게 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바라나시 가운데 드러나게 되었고 마침내 그 이름은 범예왕에게 까지 알려지게 되어 궁중으로 불려가게 되었다.
과연 그는 인물이 출중할 뿐 아니라 말과 행위가 뛰어나 범예왕은 그를 항상 그의 좌우에 앉히고 두터운 신임을 하였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지나가는 동안 태자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초조해지고 임금님의 사랑은 가면 갈수록 짙어갔다.
하루는 범예왕이,
「내일은 사냥 갈 터이니 모든 준비를 단단히 하라.」
하였다. 태자는 비로소 복수의 기회가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칼과 창, 살을 다듬었다.
이튿날 장생태자는 범예왕을 모시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모든 군신들이 이르지 못하는 곳까지 산짐승들을 몰고 들어갔다.
종일토록 한적한 산 험한 골짜기를 달리고 쏘고 또 달려 피곤한 법예왕은 어느 호숫가 반석위에 이르러 장생태자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잠이 들었다.
태자는 이때다 하고 부르르 떨면서 옆에 찼던 칼을 빼어들었다.
오랫동안 숨어 있던 복수심이 불꽃처럼 피어오른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고 고이 잠들어 있는 대왕을 들여다볼 때, 펄펄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태연자약하게 숨을 거두어 가신 아버지 장수왕이 눈앞에 떠올랐다.
「잘 참으라. 잘 견디라. 이것만이 이기는 길이다.」
마지막 부탁하신 그 말씀, 차마 그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 빼었던 칼을 칼집에 넣고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런데 깊이 잠이 들었던 범예왕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잠에서 깨어나면서 말했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무엇이 이상합니까?」
「내 지금 잠 속에서 장생태자를 보았는데 그가 푸른 칼을 들고 나를 쫓아오는 꿈을 꾸었다.」
그 때 태자는 무릅을 끓고, 목을 내밀었다.
「용서합시오, 대왕님. 제가 바로 장생태자입니다. 죽여주십시오, 대왕님.」
「응, 그대가 장생태자라고―」
대왕은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신하 그대가 바로 장생태자라니, 너무나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농담을 하지 말라.」
「아닙니다. 대왕님, 제가 정말 장생태자입니다.」
하고 그동안 내력을 소상히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방금 큰 칼을 빼어들고 복수하려 하였던 것까지도 숨김없이 다 털어놓았다.
「그러니 대왕님, 대왕님은 이제 무서워할 것이 없습니다.
나의 복수심은 아버지의 유계(遺誡)앞에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그러니 어서 저를 죽여주십시오. 그리고 이제부터는 두 다리를 쪽 뻗고 주무십시오.」
대왕은 말을 들고 감격한 나머지 옛일을 회고했다.
자기의 끊임없는 간탐과 잔인무도한 심사가 참으로 부끄러워 참회심이 복받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 태자여. 참으로 부끄러운 것은 나의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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