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숙종 34년, 무자년(戊子年, 1708년

조선 숙종 34년, 무자년(戊子年, 1708년

2월 1일

• 임금이 친히 사직단(社稷壇)에 제사지냄.

2월 27일

• 김만채(金萬埰)가 도성 수비에 대하여 상소함.

3월 3일

• 한성과 지방을 통틀어 홍역과 여역으로 죽은 자가 거의 수만 명에 달함.

3월 6일

• 김우항(金宇杭)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4월 5일

• 이언강(李彦綱)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4월 16일

• 한성과 지방에 여역이 더욱 심해지자 의사(醫司)로 하여금 약물을 보내게 하고, 관찰사를 신칙(申飭)하여 각별히 구활(救活)하도록 함.

• 도성 내 여역이 더욱 심해져서 연지동(蓮池洞)에 거주한 사부(士夫)의 경우 온 집안이 몰사하였는데, 열흘이 지나도록 시체를 수렴하지 못함.

4월 20일

• 유득일(兪得一)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4월 25일

• 경복궁의 소나무에 해조(海鳥)가 많이 날아드니, 임금이 이는 전쟁이 발발할 징조라 하여 쫓아낼 것을 명함.

5월 19일

• 날이 오래도록 가물어 잇달아 관원을 보내 비 오기를 빌었으나 응험(應驗)이 없으므로 임금이 친히 태묘(太廟)에서 비 오기를 기원함.

• 한재(旱災)가 계속되므로 의금부와 형조에 갇혀있는 죄수들을 소결(疏決)함.

5월 23일

• 한재가 계속되므로 제처(諸處)의 전망인(戰亡人) 등에 근신(近臣)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함.

5월 24일

• 임금이 사직단에 나아가 비를 빌었는데, 이 날 비가 내리더니 이튿날 아침에 갬.

5월 25일

• 유성(流星)이 환자성(宦者星) 아래에서 나옴.

• 임금이 보행(步行)으로 사직단소(社稷壇所)에 나아가 제사를 예식(禮式)대로 행함.

5월 29일

• 대사성 이제(李濟)가 성균관 운영개선 방안 10조를 상소함.

6월 13일

• 잠깐 비가 내리더니 가뭄이 계속되므로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기우제를 설행하도록 함.

6월 17일

• 기우제를 지내고, 쌍령(雙嶺)의 전망장사(戰亡將士)를 제사지내게 함.

6월 26일

• 이날 비가 흡족하게 내림.

7월 5일

• 김우항(金宇杭)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7월 29일

• 윤세기(尹世紀)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8월 9일

• 임금이 숭릉(崇陵)을 배알(拜謁)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으며, 이어서 건원릉(健元陵) · 현릉(顯陵) · 목릉(穆陵) · 휘릉(徽陵)을 배알함.

8월 28일

• 숭례문 밖에서 어떤 사람이 관(棺) 하나를 파와서 대낮에 한성 한복판에서 드러내 두어 해당 부서 관원을 추고(推考)하도록 명함.

9월 25일

• 구일제(九日製)를 거행하여 1등으로 뽑힌 심익(沈瀷)에게 급제를 내림.

9월 27일

• 낫을 대어 곡식을 전혀 거두지 못할 곳은 특별히 급재(給災)를 허락하도록 함.

• 은결(隱結) 10경 이상을 사용(私用)하다가 드러난 자는 5년을 한정하여 서용(敍用)하지 말도록 함.

9월 29일

• 제도(諸道)에서 더욱 심하게 재해를 입은 고을은 제반신역(諸般身役)을 특별히 1/3을 감해 주고, 숙종 32년(1706) 이상의 신포(身布)도 잠정적으로 수봉(收捧)을 중지하며, 경기의 대동미(大同米)는 2두를 감해 주고 인천은 더욱 흉년이 들었으므로 3두를 감하도록 함.

10월 3일

• 이조판서 이인엽(李寅燁)이 경기와 삼남의 진휼에 대한 일을 상소함.

10월 29일

• 연령군(延齡君)의 제택(第宅) 터로 전 내승(內乘) 구혁(具爀) 등 세 집의 터 2,260간과 기와집 177간의 값으로 은 3,325냥을 계상함.

11월 20일

• 임금이 대신들과 강화도에 축성(築城)하는 문제 등을 논의함.

• 우승지 김만채(金萬埰)가 상소하여 경외(京外)의 옥송(獄訟)이 적체되는 폐단 등을 논함.

12월 3일

• 임금이 대신들과 청나라의 정세 변화에 따른 국방 강화를 논의함.

12월 17일

• 조태채(趙泰埰)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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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년(辛巳年), 17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