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효종 10년 · 현종 즉위년, 기해년(己亥年), 1659년

조선 효종 10년 · 현종 즉위년, 기해년(己亥年), 1659년

2월 16일

• 겸성균관 좨주 송준길(宋浚吉)이 동몽교관(童蒙敎官) 4명을 더 뽑아 4부학당에 2명씩 배치한다는 등의 차자(箚子)를 올림.

3월 13일

• 팔도에 농사일과 양잠을 권장하고 농사짓는데 힘쓰는 자에게 신역을 탕감해 주도록 함.

3월 18일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간행함.

윤3월 20일

• 상평청으로 하여금 죽을 쑤어 기민(飢民)들을 진구(賑求)하게 함.

윤3월 29일

• 상평청으로 하여금 한성의 홀아비 · 과부 · 고아 · 자식없는 노인에게 곡식을 내려 진휼하게 함.

5월 4일

• 효종대왕이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승하함.

• 세자가 영을 내려 전 정(正) 정선흥(鄭善興), 전 정랑 장선징(張善澂), 좌랑 여성제(呂聖齊), 유학 한두상(韓斗相)을 내전으로 불러들여 부마 홍득기(洪得箕)와 함께 염습(斂襲)의 일을 보게 함.

• 종실(宗室) 평운군(平雲君) 구(俅)를 수릉관(守陵官)으로, 내관 오이공(吳以恭)을 시릉관(侍陵官)으로, 회원군(檜原君) 윤(倫)을 대전관(代奠官)으로 삼음.

• 이시방(李時昉) · 윤강(尹絳) · 이일상(李一相)을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로, 이경휘(李慶徽) · 홍처윤(洪處尹)을 도청(都廳)으로 삼는 등 국장(國葬)을 관장할 제조와 도청을 임명함.

5월 9일

• 왕세자가 면복(冕服)을 갖추고 인정문에서 즉위함. 백관의 하례(賀禮)를 받은 후 대사면령을 내리고 이어 팔방에 교시를 반포함.

• 선전관을 보내 대행대왕의 흉문을 봉황성(鳳凰城)에 먼저 알림.

5월 11일

• 대신들이 의논하여 대행대왕의 시호(諡號)를 선문장무신성현인(宣文章武神聖顯仁)으로, 묘호(廟號)를 효종(孝宗), 능호(陵號)를 영릉(寧陵)으로 정함.

5월 17일

• 산릉도감(山陵都監)이 기축년(1649) 대상(大喪) 때의 예에 의하여 승군(僧軍) 1천 명과 연군(烟軍) 3천 명을 각도에 분배하여 징발할 것을 청함.

6월 2일

• 봄부터 기근이 들어 상평청(常平廳)이 3월부터 죽을 쑤어 기민(飢民)을 먹였는데 정지함.

6월 4일

• 장마가 오래 되어 보리가 잠기고 벼가 손실되므로 기청제(祈晴祭)를 지냄.

• 큰 비가 한 달 동안 내려 팔도가 모두 극심한 수재(水災)를 입음. 한성에서는 다리를 건너다가 익사하고, 각도에서 가옥이 물에 잠기고 익사자가 속출함.

6월 26일

• 임금이 대행대왕의 행적을 적어 정원(政院)에 내려 행장저술관(行狀著述官)에게 전하게 함.

7월 2일

• 흉년이 든데다가 산릉(山陵) 역사가 겹쳐 경기 고을의 민폐가 심하므로 도감(都監)으로 하여금 거느리는 하인의 수를 줄이도록 명함.

7월 13일

• 비가 오랫동안 그치지 않으므로 예조에서 사대문에 영제(禜祭)를 지낼 것을 청함.

8월 23일

• 이시방(李時昉)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0월 8일

• 정원(政院)에서 재변이 중첩해서 나타나고 우박이 쏟아지며, 별자리가 제 위치를 벗어나며,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오므로 재변을 해소시킬 방책을 강구하기를 청함.

10월 14일

• 제궁가(諸宮家)와 각 아문(衙門)의 시장(柴場)과 어전(漁箭) 가운데 입안(立案)되었다 하거나 절수(折受)받았다 하면서 점유(占有)하는 사례가 많다 하여 이를 분명히 조사하여 처리하라고 함.

10월 28일

• 대행대왕의 재궁(梓宮)을 발인(發靷)함.

10월 29일

• 효종대왕을 영릉(寧陵)에 장사지냄. 진시(辰時)에 하현궁(下玄宮)하였는데, 임금이 희정당(熙政堂) 앞뜰로 나아가 망곡례(望哭禮)를 행함.

10월 30일

• 임금이 경모전(敬慕殿)에서 재우제(再虞祭)를 행함.

11월 2일

• 각도에 흉년이 들어 황폐해졌으므로 군병(軍兵)의 궐액(闕額)을 충정(充定)하는 일을 정지함.

11월 8일

• 청국이 사신을 보내 위문하니, 임금이 모화관에 나아가 맞이함.

11월 15일

•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를 사은정사(謝恩正使)로 삼음.

11월 17일

• 임금이 남별궁에 거둥하여 청의 사신을 접견함.

11월 19일

• 청의 사신이 돌아가니, 임금이 교외에서 전송함.

11월 23일

• 산릉도감(山陵都監)이 고용한 역군(役軍)의 품삯을 각도에서 징수하여, 병조 · 호조가 꾸어다 쓴 쌀과 베를 상환할 것을 청함. 병조의 군포(軍布)는 373동(同) 45필, 호조의 쌀은 5,020석임.

• 내사(內司)의 면포 20동(同)을 병조에 내려 아약(兒弱)에게서 거두는 포목을 탕감한 숫자를 보충하도록 명함.

12월 3일

• 공상지(供上紙) 50권을 호조에 내려 경덕궁 수리에 보태 쓰도록 함.

12월 9일

• 임금이 경모전(敬慕殿)에서 납향제(臘享祭)를 행함.

12월 10일

• 혼전(魂殿) · 국장(國葬) · 산릉(山陵)의 세 도감(都監) 제조와 낭청 이하 관원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림.

12월 13일

• 왕자와 대신, 전직 육경(六卿)과 한성부판윤 그리고 칙사를 맞이할 때의 육방승지에게 칙사가 가지고 온 담비가죽 2장씩을 하사함.

12월 16일

• 밤에 안개 비슷한 기운이 성 안에 가득 찼다가 한참 뒤에 흩어짐.

연관목차

950/1457
신사년(辛巳年), 17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