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숙종 15년, 기사년(己巳年), 1689년

조선 숙종 15년, 기사년(己巳年), 1689년

1월 10일

• 임금이 제신(諸臣)을 인견(引見)하여 왕자(王子)의 명호(名號)에 관하여 구언(求言)함.

1월 24일

• 성균관 유생들에게 황감(黃柑)을 내리고 제술(製述)을 시험하였는데, 수석을 차지한 유봉서(柳鳳瑞)에게 급제(及第)를 내려줌.

3월 3일

• 임금이 대신들과 주전문제(鑄錢問題) 등에 관하여 논의함.

3월 6일

• 오시복(吳始復)을 한성부판윤으로, 정박(鄭樸)을 한성부우윤으로 삼음.

윤3월 11일

• 김도연(金道淵)이 음독자살하였는데, 한성부에서 그 시체를 검사함.

윤3월 12일

• 판의금부사 민암(閔黯)이 상소하여 이사명(李師命)의 시체를 다시 검사하여 사사(詐死) 여부를 밝혀야 한다 하므로, 한성부에 명하여 그 무덤을 파헤치고 살펴본 결과 사사설(詐死說)은 거짓으로 드러남.

윤3월 28일

• 예조판서 민암(閔黯) · 이조판서 심재(沈梓) 등이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壽恒)의 처형을 상소함.

4월 25일

• 임금이 창경궁으로 이어(移御)함.

5월 1일

• 윤이제(尹以濟)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5월 2일

• 왕비 민씨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음.

5월 4일

• 폐비(廢妃)한 일을 태묘(太廟)와 효사전(孝思殿)에 고함.

• 민암(閔黯)이 지은 폐비교문(廢妃敎文)을 중외에 반포함.

5월 8일

• 봉상시(奉常寺)에 신실(神室)이 있어 악해독(岳海瀆)과 여러 산천의 위판(位版)을 간직하여 매번 제사 때 내어서 제사를 지냈는데, 이에 이르러 신실 앞의 큰 나무가 저절로 부러져 넘어지니 임금이 예조로 하여금 제사를 마련하여 위안하도록 함.

5월 11일

• 윤지완(尹趾完)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5월 17일

• 큰 바람이 불어 종묘의 나무가 많이 뽑히고, 광릉(光陵) 능각(陵閣)의 기와와 전문(箭門)이 떨어지고 부러짐.

6월 3일

• 이우정(李宇鼎)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7월 21일

• 두 번째 기우제를 지냈으나 비가 내리지 않으므로 세 번째 기우제를 종묘와 사직 · 북교(北郊)에서 행하게 함.

8월 8일

• 청의 사신이 그 황후의 상(喪)을 고하기 위하여 오니, 서교(西郊)에서 맞이하고 돌아와 인정전(仁政殿)에 이르러 거애례(擧哀禮)를 행하고 사신을 접견함.

9월 9일

• 성균관 구일과제(九日課製)에서 조기석(趙祺錫)이 장원 급제(及第)함.

9월 30일

• 한성부좌윤 윤지선(尹趾善)이 병으로 사직함.

10월 19일

• 임금이 호조와 병조의 돈 1천 냥을 내수사(內需司)로 옮겨 보내도록 함.

11월 5일

• 관상감(觀象監)에서 밤이 되면 손방(巽方)에 흰 기운이 있어 점점 남쪽으로 옮겨간다고 보고하여, 임금이 목멱산(木覓山)과 강화에 가서 살피게 하였으나 끝내 그 근저를 찾지 못함.

• 성균관에 감(柑)을 하사하고 시험을 실시하여 수석을 한 권민(權愍)에게 급제(及第)를 내림.

12월 19일

• 독서당(讀書堂)에 7명을 뽑았는데, 유세명(柳世鳴) · 민창도(閔昌道) · 이현조(李玄祚) · 김문하(金文夏) · 채팽윤(蔡彭胤) · 홍돈(洪墩) · 권중경(權重經)이 참여함.

12월 20일

• 임금이 독서당 여러 신하를 승정원에 모이라고 명하여, 검약(儉約)을 숭상하고, 재용(財用)을 절감하며, 세렴(稅斂)을 가볍게 하는 도리를 친히 책문(策問)하여 제학 유명천(柳命天)에게 고사(考査)하라고 명하고, 차등있게 상을 내림.

12월 25일

• 1689년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아 주경관(主梗官)을 보내 협강(峽江)의 음냉(陰冷)한 곳의 얼음을 취하여 빙고(氷庫)에 저장하였는데, 두꺼운 것이 겨우 두 치[寸]임.

• 내수사(內需司)의 여정포(餘丁布) 250필을 경기에 내려주어 우역(郵驛)의 비용에 보태도록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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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년(辛巳年), 17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