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경종 원년, 신축년(辛丑年), 1721년

조선 경종 원년, 신축년(辛丑年), 1721년

1월 24일

• 당상관 2명을 차출하여 숭릉(崇陵)의 표석 세우는 일을 감독하게 함.

1월 29일

• 이건명(李健命)이 영빈(寧嬪)의 제택을 고쳐 지으라는 명을 거둘 것을 청함.

2월 4일

• 여러 도(道)의 이앙(移秧) 및 소의 도살을 금지함.

2월 5일

• 이만성(李晩成)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2월 11일

• 책봉하는 조서(詔書)를 가지고 온 청나라 사신을 모화관에서 맞이함.

2월 13일

• 봉전(封典) 때문에 반사(頒賜)하고 백관의 자급(資級)을 올림.

2월 26일

• 임금이 명릉(明陵)에 나아가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에게 제사하고 익릉(翼陵)에 전알(展謁)함.

2월 29일

• 정시(庭試) 문과와 무과를 실시하여 문과 7명, 무과 148명을 뽑음.

4월 3일

• 식년별시(式年別試)를 실시하여 문과 34명, 무과 86명을 뽑음.

4월 10일

• 세종 때에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었으나 병화로 깨어져 없어졌는데, 사신의 편에 그 가본(假本)을 얻어왔으므로 1건을 만들어 바치게 함.

4월 25일

• 오랜 가뭄으로 삼각산과 목멱산 · 한강에 기우제를 행함.

4월 28일

• 이관명(李觀命)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5월 4일

• 중신(重臣)을 보내 사직단에서 비를 빌게 함.

5월 19일

• 여덟 차례 비를 빌었으나 끝내 비가 오지 않으므로 북교(北郊)에서 또 기도하고 모화관(慕華館)의 못가에서 석척동자기우제(蜥蜴童子祈雨祭)를 지냈으며, 여염(閭閻)에서는 병류(甁柳)하여 3일만에 그침.

5월 20일

• 권성(權忄省)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5월 24일

• 대신을 보내 사직단에서 비를 빌고, 경회루(慶會樓) 못 가에서 석척기우제(蜥蜴祈雨祭)를 지냄. 남문을 닫고 북문을 열었으며, 저자를 옮김.

5월 29일

• 대신을 보내 종묘에서 비를 빌고 춘당지(春塘池) 가에서 석척기우제를 지냄. 또 남문을 닫고 북문을 열었으며, 저자를 옮김.

6월 1일

• 이정소(李廷熽)가 가뭄의 상황을 아뢰고, 죄수의 석방과 민폐를 덜어줄 것 등을 청함.

6월 8일

• 임금이 효령전(孝寧殿)에서 연제(練祭)를 지냄.

6월 15일

• 가뭄이 계속되므로 선농단(先農壇)과 전망처(戰亡處) 곳곳에 제사를 차리고 비를 빌게 함.

6월 28일

• 비가 내리므로 사직단의 기도를 중지함.

윤6월 3일

• 전옥(典獄)의 죄가 가벼운 죄인을 석방하게 함.

7월 8일

• 큰 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나무가 부러지고 집이 무너졌는데, 팔도가 모두 그러하여 감사의 장계가 잇따라 들어옴.

7월 20일

• 돈화문(敦化門)의 동쪽 부연(付椽)의 위 아래층이 무너짐.

• 임금이 대신들과 각도의 수륙조련(水陸操鍊)과 재해의 구휼 등에 관하여 논의함.

8월 10일

• 이홍술(李弘述)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8월 20일

•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등의 청에 따라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제(王世弟)로 삼음.

8월 21일

• 연잉군을 궐내에 들어와 거처하게 하고 위호(位號)를 왕세제로 결정함.

9월 6일

• 왕세제와 세제빈(世弟嬪)이 궁궐로 들어와 효령전(孝寧殿)의 재실에 전배(展拜)함.

9월 23일

• 큰 바람이 불어 헌릉(獻陵)의 홍살문(紅箭門) 안 두 큰 나무가 쓰러짐.

9월 26일

• 왕세제와 세제빈의 책봉례(冊封禮)를 행함.

• 사포서(司圃署)에 불이 나서 서사(署舍)와 전곡(錢穀)이 모두 타버림.

9월 27일

• 임금이 중외(中外)의 신민(臣民)에게 교지(敎旨)를 반포하고, 왕세제가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조하(朝賀)를 받음.

10월 3일

• 관학유생(館學儒生) 정형복(鄭亨復) 등이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함.

10월 14일

• 조태구(趙泰耈)가 왕세제에게 정사를 대행(代行)하게 한 명(命)을 거둘 것을 청함.

10월 16일

• 윤헌주(尹憲柱)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0월 17일

• 김창집(金昌集) 등이 대리절목(代理節目)에 관한 차자(箚子)를 올리고, 임금이 세제 대행의 명을 회수함.

11월 4일

• 등극(登極)한 경사로 증광과(增廣科)를 행하였는데, 전시(殿試)에서 33명을 뽑음.

11월 5일

• 동강(東江)의 뚝섬[纛島] 마을에 불이 나서 30여 호가 불타고 3명이 사망함.

11월 21일

• 날씨가 추우므로 전옥(典獄)의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함.

11월 26일

•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서 사형수들을 삼복(三覆)하여 10명을 사형시키도록 하고 2명은 살려주게 함.

11월 27일

• 종묘와 사직 · 북교(北郊)에 기설제(祈雪祭)를 행함.

12월 18일

• 이삼(李森)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2월 22일

• 환관 박상검(朴尙儉)이 청휘문(淸暉門)을 폐쇄하고 왕세제를 살해하려 하므로 왕대비가 이를 적발하고 그 도당인 문유도(文有道)와 궁인(宮人) 석렬(石烈)과 필정(必貞)을 모두 하옥시켜 국문함.

연관목차

1013/1457
신사년(辛巳年), 17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