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조 29년, 계유년(癸酉年), 1753년

조선 영조 29년, 계유년(癸酉年), 1753년

1월 25일

•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서 별시재(別試才)를 설행(設行)하여 잇따라 3일 동안 행함.

• 여러 신하들이 성수(聖壽)가 육순이 되었다는 것으로 번갈아 칭경(稱慶)할 것을 청함.

2월 8일

• 임금이 문묘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춘당대에서 시사(試射)하여 6명을 뽑음.

• 능창군(綾昌君) 숙(橚)이 근래 종실들이 매우 빈궁하게 되어 강교(江郊)에 거처하는 사람들이 모두 궁핍하다고 하니, 해조로 하여금 옷과 음식을 지급하도록 함.

2월 13일

• 환궁할 때 흥인문(興仁門)에 들러서 치성(雉城)을 증축해야 할 곳에 홍기(紅旗)를 세워놓으라 하고 한 개의 치장(雉墻) 사이는 130보를 기준으로 하도록 함.

2월 18일

• 정시문과(庭試文科)의 초시(初試)를 설행(設行)함.

2월 29일

•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서 문과전시(文科殿試)를 설행하고 11명을 뽑음.

3월 27일

•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서 관무재(觀武才)의 시재(試才)를 설행하였는데, 선조 25년(1592)의 명장 곽재우(郭再祐)의 자손과 방손(傍孫) 곽정후(郭禎垕)를 녹용하여 권무군관(勸武軍官)에 넣게 함.

5월 6일

• 대신을 보내 종묘와 사직에 비를 빌도록 함.

5월 10일

• 임금이 북교(北郊)의 단소(壇所)에 나아가 위판(位版)을 봉심(奉審)함.

5월 11일

• 임금이 친히 기우제를 지냈는데 비가 조금 내리므로 형조와 의금부에 명하여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시키도록 함.

5월 12일

• 비가 오기는 왔으나 5촌 1작이었을 뿐이니, 13일 선농단(先農壇)에 친제(親祭)하겠다고 함.

5월 13일

• 임금이 선농단에 거둥함. 단소(壇所)에 나아가 위판을 봉심(奉審)한 후 논가에 있는 부로(父老)들을 불러 우택(雨澤)의 다과와 이앙(移秧)의 조만(早晩)에 대해 순문(詢問)함.

5월 14일

• 임금이 친히 기우제를 지냄.

5월 15일

• 동문(東門)에 치첩(雉堞)을 수축하는 공사를 하는데 주인 없는 분묘가 많아 뼈가 드러나 참혹하다 하여, 명하여 빨리 묻어주게 함.

5월 16일

• 승지 이지억(李之億)에게 기조(騎曹, 병조)의 창고에 남아 있는 전화(錢貨)를 적간(摘奸)하도록 함.

5월 21일

• 모화관(慕華館)의 석척기우제(蜥蜴祈雨祭)를 경회루(慶會樓) 연못으로 옮겨서 행하도록 함.

• 경회루에서 동자(童子)들에게 비를 빌게 하는 것을 22일은 춘당대(春塘臺)에서 거행하도록 함.

5월 26일

• 임금이 친히 기우제를 지냄.

5월 29일

• 임금이 정전(正殿)을 피하고 철악(撤樂)하고, 친히 종묘삭제(宗廟朔祭)의 제문(祭文)을 지어 기우(祈雨)함.

6월 1일

• 오방(五方)에 토룡제(土龍祭)를 지내라고 명함.

6월 3일

• 경외에서 함부로 형장(刑杖)을 쓰는 것에 대해 엄중히 계칙(戒飭)함.

• 동성(東城)을 개축할 때 근래 전염병과 두진(痘疹)으로 죽은 남녀 수천 명의 유골을 동문과 수구문(水口門) 사이에 구덩이를 파서 아무렇게나 묻었다 하여 감예관(監瘞官)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들이게 함.

6월 11일

• 비가 내리므로 토룡제(土龍祭)를 정지하도록 하고, 농민을 불러 우택(雨澤)의 다과에 대해 하문함.

7월 2일

• 봉원도감당상(封園都監堂上)이 입시하여 정자각(丁字閣)과 전사청(典祀廳) · 비석(碑石) · 양마석(羊馬石)의 공역을 아뢰니, 진청(賑廳)의 쌀 1,200석을 주도록 함.

7월 22일

• 사대문(四大門)에 영제(禜祭)를 설행하라고 명함.

7월 27일

• 서명빈(徐命彬)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8월 7일

• 조명교(曺命敎)를 한성부좌윤으로 삼음.

9월 4일

• 이일제(李日躋)를 한성부좌윤으로 삼음.

9월 7일

• 조영국(趙榮國)을 한성부판윤으로, 김한철(金漢喆)을 한성부좌윤으로, 심성진(沈星鎭)을 한성부우윤으로 삼음.

9월 11일

•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고유제(告由祭)를 행함.

9월 12일

• 도성 안의 천거(川渠)가 근래 특히 심하게 막혀서 큰 비가 올 때마다 물길이 넘쳐 피해가 적지 않고 부민이 익사할 우려가 있다 하여 1754년 봄을 기다려 쳐내게 함.

9월 18일

• 진사복시(進士覆試)를 행하고, 하루 건너서 생원복시(生員覆試)를 행함.

10월 5일

• 서명빈(徐命彬)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0월 17일

•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서 선비를 시험하여 이현옥(李鉉玉) 등 15명을 뽑음.

10월 27일

• 한덕필(韓德弼)을 한성부우윤으로 삼음.

10월 29일

• 문과 · 무과의 전시(殿試)를 설행하여 34명을 뽑음.

11월 23일

• 김성응(金聖應)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2월 2일

• 추상휘호경과(追上徽號慶科)는 대증광(大增廣)으로 거행하도록 함.

12월 27일

• 기내(畿內)와 삼도(三都)에 심휼사(審恤使)를 보내 민간의 기곤(飢困)과 영어(囹圄)의 원왕(冤枉) 등을 살피게 하고, 나머지 7도는 도신(道臣)에게 하유하여 거행하게 함.

12월 30일

• 1753년 경중오부(京中五部)의 원호(元戶)는 3만 4,953호이고 인구는 17만 4,203명(남자 8만 2,441명, 여자 9만 1,762명)이며, 팔도의 원호는 173만 7,796호이고 인구는 711만 4,533명(남자 350만 1,424명, 여자 361만 3,001명)임.

연관목차

1045/1457
신유년(辛酉年), 18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