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조 2년, 병오년(丙午年), 1726년

조선 영조 2년, 병오년(丙午年), 1726년

1월 7일

• 임금이 기곡(祈穀)하기 위하여 사직에 나아가 재숙(齋宿)함.

1월 13일

• 임금이 위패(位牌)를 옮겨 봉안하기 위해 익선관(翼善冠) · 흑단령포(黑團領袍) · 옥대(玉帶) · 흑화(黑靴)를 갖추고 태묘(太廟)에 나아감.

1월 23일

• 유명홍(兪命弘)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4월 9일

• 종묘를 개수하고 남은 재목을 노론 4대신의 사충서원(四忠書院) 역사에 지급하도록 함.

5월 27일

• 오부(五部)의 방민(坊民)들이 전포(廛舖)를 설치하는 일로 대궐 밑에서 봉소(封疏)하므로, 그 수창(首倡)하여 봉소한 사람을 죄주게 함.

7월 2일

• 혜순자경대왕대비전(惠順慈敬大王大妃殿)의 존호(尊號)를 헌열(獻烈)이라 올리고, 왕대비전의 존호를 경순(敬純), 단의왕후(端懿王后)의 휘호를 공효정목(恭孝定穆)이라 올림.

8월 5일

•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한성 산의 송금(松禁)을 엄하게 신칙(申飭)하고, 감역관(監役官) 3명을 파직함.

8월 18일

• 예조가 영제(禜祭)를 지냈는데도 큰 비가 잇따라 내려 곡식이 손상된다 하여 사대문의 영제를 다시 지내기를 청함.

8월 26일

• 임금이 종묘와 사직에 대신을 보내 기청제(祈晴祭)를 지내도록 함.

8월 28일

• 임금이 경덕궁에 나아가 영휘전(永徽殿)을 봉심(奉審)함.

• 윤헌주(尹憲柱)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9월 10일

•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천둥의 이변을 자책하고, 대각(臺閣)의 논계(論啓)를 가납(加納)하도록 아룀.

9월 27일

• 임금이 경덕궁 영휘전에서 전알례(展謁禮)를 행함.

10월 7일

• 임금이 경소전(敬昭殿)에서 담제(禫祭)를 행함.

10월 12일

• 임금이 경소전에서 동가(動駕)를 고하는 제사를 행하고, 신연(神輦)을 모시고 태묘(太廟)로 나아감.

10월 14일

• 민진원(閔鎭遠)이 종묘를 수리할 때 망건장(網巾帳)과 외면장(外面帳)을 다시 사용할 것을 청함.

10월 20일

• 임금이 명릉(明陵)에 거둥하여 전알례(展謁禮)를 행함.

11월 2일

• 임금이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으로 환어(還御)함.

• 홍화문(弘化門)은 그전처럼 닫아버리고, 돈화문(敦化門)의 표신(標信)에 따라 여닫되 건양문(建陽門)에는 입직하는 군사를 차출하고, 동룡문(銅龍門)도 파수하게 함.

11월 6일

• 임금이 숙빈(淑嬪)의 사우(祠宇)에 나아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하고, 환궁하는 도중 잠저(潛邸)였던 창의궁에 들름.

11월 27일

• 임금이 대왕대비에게 존호(尊號)를 올림.

12월 22일

• 임금이 희정전(熙政殿)에 나아가 세 차례의 계복(啓覆)을 행함.

12월 30일

• 1726년 한성 오부(五部)의 원호(元戶)는 3만 2,747호, 인구는 18만 8,597명(남자 8만 9,361명, 여자 9만 9,236명)이며, 팔도의 원호는 158만 1,851호, 인구는 680만 6,803명(남자 328만 2,858명, 여자 352만 3,945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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