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숙종 18년, 임신년(壬申年), 1692년

조선 숙종 18년, 임신년(壬申年), 1692년

1월 7일

• 성균관에 감귤을 내리고 선비들을 시험보여 수석을 차지한 진사 이진수(李震壽)에게 급제(及第)를 내림.

1월 9일

• 임금이 태묘(太廟)에 배알(拜謁)함.

1월 27일

• 한성부에서 한성 안의 사대부 중 떠도는 말에 놀라고 동요되어 가족을 이끌고 시골로 내려간 자가 30호인데, 그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다고 아룀.

2월 27일

• 거가(車駕)가 사하리(沙河里)에 이르러 장단(將壇)에 올라가 친림(親臨)하여 열무(閱武)함.

4월 3일

• 서원(書院)을 세우는 역사(役事)가 크게 일어나 현액(懸額)의 청원이 잇따르고 한 사람을 중첩하여 세우는 일까지 있으므로, 이를 자제하고 도덕과 학문이 뚜렷한 사람만 들어주도록 함.

4월 24일

• 경기에 큰 흉년이 들자 강도(江都)에 있는 군량미를 내어 구제하도록 함.

5월 5일

•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므로 비를 빌도록 명했는데, 이날 저녁에 비가 조금 내림.

5월 12일

• 춘당대(春塘臺)에 있는 영화당(暎花堂)이 완성됨.

5월 14일

• 임금이 남교(南郊)에서 기우제를 지냄.

5월 16일

• 다시 기우제를 지내게 함.

7월 12일

• 경기에 홍수가 크게 났는데, 임금이 명을 내려 기청제(祈晴祭)를 지내고 사대문(四大門)에서 영제(禜祭)를 지내도록 함.

7월 15일

•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서 무예를 관람하고, 노량의 교련장에서 관병(觀兵)하고자 하여 먼저 유사(有司)에 명하여 날을 가려 아뢰도록 함.

7월 16일

• 이의징(李義徵)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7월 19일

• 열무(閱武) 때에는 군중(軍中) 호령(號令)의 절주(節奏)를 훈련도감에서 전담한다 하여 훈련대장 이의징(李義徵)에게 갑주(甲冑)와 궁시(弓矢)를 내려주도록 함.

7월 29일

• 임금이 노량(露梁)의 장단(將壇)에서 크게 열병(閱兵)하고, 각각 상벌을 내림.

7월 30일

• 7월에 여러 도에서 홍수가 나서 민가 수천 호가 떠내려가고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호서(湖西)가 더욱 심함.

• 금군(禁軍)의 전마(戰馬)와 병기(兵器)를 수리하도록 함.

8월 7일

• 임금이 창덕궁으로 환궁(還宮)함.

8월 8일

•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서 무재(武才)를 관람함.

8월 11일

• 무재(武才)에서 입격한(入格)한 36명에게 차등 있게 가자(加資)하고, 문과 6명을 뽑음.

8월 20일

• 임금이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전알(展謁)하고, 회가(回駕)할 때 노량의 장단(將壇)으로 나아가 수원(水原)의 군병을 친열(親閱)함.

9월 5일

• 흉년이어서 민폐가 있다 하여 남한산성에서의 조련(操鍊)을 정지하도록 하고 수원에서의 무재(武才) 시험의 상격(賞格)을 호조와 병조로 하여금 마련하여 나눠주게 하였는데, 진휼청(賑恤廳)의 전화(錢貨)는 쓰지 못하게 함.

9월 24일

• 한성과 경기 · 충청도 · 전라도 · 경상도 · 강원도에서 지진이 크게 일어남.

10월 29일

• 이해(1692) 큰 바람이 많아 해로(海路)에서 파선(破船)하여 죽은 사람이 200여 명이고 인가에 불이 나서 죽은 사람이 40여 명, 범에게 물려가거나 벼락을 맞거나 익사(溺死) · 압사(壓死)한 사람이 모두 1천여 명임. 이외에도 전염병으로 요사(夭死)한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음.

10월 30일

• 후원(後園)에 심었던 종려나무를 뽑아서 민가의 본주인에게 돌려보냄.

11월 12일

• 삼복(三覆)을 행하여 사형수 8명을 단죄(斷罪)함.

12월 2일

• 남한산성 한봉(汗峰)에 두 돈대(墩臺)를 쌓는데 쓸 비용으로 병조에 있는 여정포(餘丁布) 30동(同)을 주도록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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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년(辛巳年), 17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