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숙종 33년, 정해년(丁亥年), 1707년

조선 숙종 33년, 정해년(丁亥年), 1707년

3월 8일

•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서 무재(武才)를 관람했는데, 4일 만에 끝냄. 이어 문신에게 정시(庭試)를 베풀어 칠언배율이십운(七言排律二十韻)을 짓게 하여 수석을 차지한 부사과 이진은(李震殷)을 특별히 가선(嘉善)으로 올림.

3월 22일

• 조태채(趙泰采)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3월 26일

• 문과와 무과의 별시(別試)를 설행(設行)하여 문과에서 이기성(李基聖) 등 12명을 뽑음.

4월 2일

• 문과와 무과의 중시(重試)를 설행(設行)하여 문과에서 김일경(金一慶) 등 7명을 뽑음.

4월 8일

• 임금이 종묘에서 배알(拜謁)하고 재숙(齋宿)함.

4월 20일

• 형장(刑杖)의 사용을 일체 금하도록 함.

5월 9일

• 홍진(紅疹)이 크게 일어나 죽은 자가 매우 많으므로 경외(京外)에 신칙(申飭)하여 적자(赤子)로 하여금 요사(夭死)를 막도록 함.

5월 15일

• 한성부판윤 조태채(趙泰采)가 남한산성 한봉(汗峰)을 축성할 것을 상소함.

7월 11일

• 우의정 이이명(李頤命)이 각 능(陵)을 수개(修改)하는 일에 대해 상소함.

7월 23일

• 비가 그치지 않아 화곡(禾穀)이 손상되었으므로 승정원에서 기청제(祈晴祭)를 지낼 것을 청함.

7월 26일

• 임금이 창덕궁에서 경덕궁으로 이어(移御)함.

8월 4일

• 제도(諸道)에서 봉진(封進)하는 것을 1708년 가을까지를 기한으로 하여 잠시 감하게 함.

8월 22일

• 서문유(徐文裕)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8월 29일

• 유소의(劉昭儀) 방(房)에서 삼각산 북쪽 산기슭을 시장(柴場)으로 절수(折受)한 것을 혁파함.

• 서원(書院) 난립을 금단하도록 함.

9월 14일

• 승지 황일하(黃一夏)의 건의에 따라 돈의문(敦義門)을 열게 함.

9월 25일

• 구일절제(九日節製)를 베풀어 진사 조상경(趙尙慶) 등 9명을 뽑음.

10월 1일

• 동문선(東文選)에는 명종 · 선조 이후의 시문(詩文)이 뽑혀 들어가 있지 않으므로 찬수청(撰修廳)으로 하여금 일체 뽑아 넣어 간행하도록 함.

11월 7일

• 임금이 재해를 많이 입은 지방에 구휼을 시행하도록 함.

11월 15일

• 전염병으로 사망한 도성민들을 위해 근신(近臣)을 보내 북교(北郊)에 단(壇)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냄.

12월 4일

• 민진후(閔鎭厚)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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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년(辛巳年), 17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