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 20년, 병진년(丙辰年), 1796년

조선 정조 20년, 병진년(丙辰年), 1796년

1월 3일

• 임금이 인정전에서 기곡제(祈穀祭)의 향축을 주관하고 사직단으로 가는 길에 종로에서 공시인(貢市人) 및 오부의 부로(父老)들에게 불편한 점을 물어봄.

1월 4일

• 사직단에 기곡제(祈穀祭)를 지냄.

1월 7일

• 반궁(泮宮)에서 인일제(人日製)를 베풂.

1월 8일

• 영희전(永禧殿)과 저경궁(儲慶宮)에 전배(展拜)함.

1월 11일

• 비변사에서 광주부(廣州府) 설치에 대한 첨가 절목을 올리니 법식을 정하여 시행하도록 함.

1월 15일

• 이치중(李致中)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 각사와 각영에서 1795년도의 회계장부를 올림.

1월 16일

• 임금이 명정문에서 춘도기유생(春到記儒生)들에게 제술을 시험했으나 유생의 반차(班次)가 어긋나고 잡스러워 과거를 정지하고 편전으로 돌아와 전강(殿講)을 행하여 수석을 차지한 자에게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함.

1월 20일

• 임금이 현륭원(顯隆園)에 갈 때 어가(御駕)가 화성(華城) 교귀정(交龜亭)에 이르자 정자 이름을 영화(榮華)로, 야(野)를 관길(觀吉)로, 평(坪)을 대유(大有)로, 도랑을 만석(萬石)으로 명명하고 비석을 세워 기록하도록 함.

1월 21일

• 임금이 현륭원에 전배(展拜)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함.

1월 24일

• 임금이 행궁에서 출발하여 환궁함.

1월 26일

• 춘당대에 나아가 원행(園行)할 때 어가(御駕)를 따른 군교(軍校)들에게 서총대시사(瑞蔥臺試射)를 행함.

1월 27일

• 선농단에 제향할 때 위판(位版)을 태상시에서 받들고 나갔다가 제향을 마치고는 다시 태상시에 봉안하는 과정에서 선전관이 표신(標信)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다가 성문을 열고 헌관이 그대로 모시고 들어가게 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도록 함.

1월 29일

• 권유(權裕)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2월 4일

• 한성부 각부에서 올린 과년토록 결혼하지 못한 남녀 별단(別單)이 부실하므로 한성부의 당상을 추고하고 기한을 5일 더 주어 다시 찾아 내도록 함.

2월 17일

• 임금이 남소영(南小營)에 나아가 내금위의 춘등(春等) 시사(試射)를 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훈련원(訓鍊院) 공해(公廨)와 장원(墻垣)이 퇴락한 것을 보고 수리하고 보수하는 동안 훈련원 당상들을 감봉 처분하도록 함.

2월 20일

• 명정문에서 문과 중시를 행하고, 이어서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무과 중시 및 문 · 무과 별시를 행하여 문과에서 3명, 무과에서 15명을 뽑고, 중시에서는 문과에서 10명, 무과에서 61명을 뽑음.

3월 12일

• 군장(軍裝)의 사치를 금하였는데, 군교의 대단(大緞) · 갑사(甲紗) 등속도 금지하고 화살통의 미전(尾箭)을 제거함.

3월 13일

• 중국 연경에서 《궐리지(闕里志)》와 《궐리문헌고(闕里文獻考)》 등의 책과 와 등을 구입해 온 역관에게 상을 내림.

3월 17일

• 정리주자(整理鑄字)가 완성됨.

3월 28일

• 고 충신 홍익한(洪翼漢) · 윤집(尹集) · 오달제(吳達濟)에게 사제(賜祭)함.

4월 2일

• 임금이 춘당대에 나아가 서북별부료(西北別付料) 군사에게 활쏘기를 시험함.

4월 4일

• 임금이 춘당대에 나아가 장용영(壯勇營) 군사에게 활쏘기를 시험하고, 초계문신(抄啓文臣)에게 직접 시험을 보임.

5월 12일

• 무고(武庫)에서 《자초신방(煮硝新方)》을 인출하여 중외에 반포함.

• 한성과 지방의 살인옥사를 심리함.

6월 18일

• 임금이 혜경궁(惠慶宮)에 의복을 진상하고 음식을 올리는 예식을 거행함.

6월 22일

• 날씨가 무더우므로 한성과 지방의 경범 죄수들을 석방함.

7월 7일

• 반궁(泮宮)에서 칠석제(七夕製)를 설행하도록 함.

7월 19일

• 성균관에서 칠일제(七日製)를 행함.

7월 25일

• 문신 전강(殿講)과 일차유생(日次儒生)의 강제(講製)를 행함.

8월 3일

• 임금이 명정문(明政門)에 나아가 초계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와 제술(製述)을 행함.

8월 7일

• 좌포장 신응주(申應周)가 동생이 효경교(孝經橋)를 지나다가 낙상하였다는 이유로 심야에 사람들을 모아 석교를 헐어버리자 찬배(竄配)함.

8월 11일

•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을 한성과 지방에 반포해 내림.

8월 26일

• 광주유수에게 헌릉(獻陵) · 선릉(宣陵) · 정릉(靖陵)을 수리하도록 함.

8월 29일

• 양재역(良才驛)을 영화역(迎華驛)으로 고치고 우치(郵治)를 화성 북문 밖으로 옮겨 설치함.

9월 17일

• 초계문신(抄啓文臣)의 과강(課講)과 친시(親試)를 시행함.

• 관학유생들이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의 문묘종사를 청하니 윤허함.

9월 18일

• 임금이 춘당대에서 서총대시사(瑞蔥臺試射)를 시행함.

9월 23일

• 뚝도의 화재로 소실된 민가 백수십 호에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함.

10월 17일

• 초계문신(抄啓文臣)의 과강(課講)과 친시(親試)를 행하여 전강(殿講)한 유생들과 비교하고, 상재생(上齋生)의 응제(應製)를 시행함.

10월 20일

• 정민시(鄭民始)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1월 6일

• 육상궁(毓祥宮) · 선희궁(宣禧宮) · 의소묘(懿昭廟)에 잔을 올리고 창의궁(彰義宮)을 참배함.

11월 15일

• 날이 추워지자 한성부 오부로 하여금 버려진 아이들을 찾아내도록 함.

11월 22일

• 임금이 인정전에서 묘 · 전 · 능 · 원 · 궁의 향과 축문을 직접 전해주고 동쪽 뜰에서 경건하게 전송한 후 영희전(永禧殿)을 참배함.

11월 28일

• 초계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를 실시함.

12월 9일

• 이재학(李在學)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2월 10일

• 춘당대에서 초계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와 시사(試射)를 실시하고, 선전관의 사강(射講)과 장용영(壯勇營)의 시사(試射)를 실시함.

12월 15일

• 책을 인쇄 간행하던 감인소(監印所)를 주자소(鑄字所)로 개칭함.

12월 23일

• 임금이 인정전에 거둥하여 종묘 · 사직 · 전 · 궁의 납향제에 쓸 향과 축문에 직접 도장을 찍고 대궐 뜰에서 경건하게 전송한 후 경모궁(景慕宮)에서 의식을 연습함.

12월 27일

• 이경무(李敬懋)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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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년(辛酉年), 18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