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 6년, 임인년(壬寅年), 1782년

조선 정조 6년, 임인년(壬寅年), 1782년

1월 3일

• 임금이 인정전에서 기곡제(祈穀祭)의 축(祝)에 직접 서압(署押)하고 사단(社壇)에 나아가 제기와 희생을 살핌.

1월 6일

• 임금이 종묘(宗廟) · 영녕전(永寧殿) · 육상궁(毓祥宮) · 경모궁(景慕宮)에 전알(展謁)함.

3월 10일

• 임금이 문묘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성균관 비천당에서 문과를, 하련대(下輦臺)에서 무과를 실시하여 33명을 뽑음.

6월 12일

• 홍문관의 서책을 대내(大內)와 신하들이 열람할 때 아패(牙牌)에 기록하고 쓰는 것을 정식으로 삼음.

6월 28일

• 경희궁 금상문(金商門)에서 흉소(凶疏)를 올린 이유백(李有白) · 이택징(李澤徵) 등을 친국(親鞫)함.

7월 13일

• 장마가 계속되어 경기감사에게 피해 상황을 보고하도록 함.

7월 21일

• 이명식(李命植)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7월 29일

• 임금이 종묘와 영녕전 및 경모궁(景慕宮)에 전알(展謁)함.

8월 7일

• 양주의 누원점인(樓院店人)들이 한성의 어물전으로 들어와야할 어물이 중간에서 매점매석되어 생활이 어려우므로 금지시켜 달라고 호소함.

8월 10일

• 경모궁에 경모궁관(景慕宮官) 1명과 노비 100명을 추가로 지급함.

8월 25일

• 경기지역의 농사가 흉년이 들어 도성의 쌀값이 뛰어 오르자 관서와 해서의 쌀 4만 석을 운반해 오도록 함.

8월 29일

• 임금이 관풍각(觀豐閣)에서 벼베기를 관람함.

9월 7일

•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문효세자(文孝世子)를 낳음.

9월 15일

• 성균관에서 구일제(九日製) 시험을 행함.

9월 26일

• 임금이 영우원(永祐園)에 전배(展拜)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함.

10월 5일

• 김종수(金鍾秀)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0월 15일

• 채제공(蔡濟恭)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0월 25일

• 정창성(鄭昌聖)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1월 2일

• 흉년으로 도성의 백성이 굶주리자 가난한 호구에게 진휼청의 쌀을 싼 값으로 팔도록 함.

11월 24일

• 춘당대(春塘臺)에서 완성된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임금에게 올림.

12월 1일

• 임금이 창덕궁 인정전에서 사직 · 종묘 · 영녕전 · 경모궁(景慕宮)의 고유제(告由祭) 축문에 친히 어휘(御諱)를 써 넣음.

12월 13일

• 임금이 창덕궁 인정전에서 문과 전시를, 춘당대(春塘臺)에서 무과 전시를 각각 시행하여 문과 5명, 무과 2,692명을 뽑음.

이해

• 창덕궁의 중희당(重熙堂)을 건립하고 어필(御筆)로 현판을 씀.

• 사육신 묘역에 신도비를 건립함. 비명은 태학사 조관빈(趙觀彬)이 찬하고 서(書)는 당나라 안진경체(顔眞卿體)를 집자(集字)함.

• 측우기를 3대 제작함.

• 교서관(校書館)을 창덕궁의 돈화문 밖으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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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년(辛酉年), 18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