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작

광작

[ 廣作 ]

시대명 조선

조선 후기 경작지의 규모를 확대해 넓은 토지를 경작하던 농사의 방법.

과 등 조선 후기 농법의 발달은 노동력을 크게 절감시켜 한 사람이 이전보다 훨씬 넓은 토지를 경작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에 따라 대규모로 농지를 경작하는 광농(廣農)이 나타났다. 이들은 새로운 농법을 도입하고 농업노동자를 고용해 적게는 60~80마지기, 넓게는 120마지기 이상의 농지를 경작했다. 이들 중에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경작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남의 땅을 빌려서 경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서, 이들은 주로 상품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상업작물을 재배하여 부를 축적했다.

광작의 출현은 농촌사회의 분화를 촉진시켰으며, 광작이 늘어남에 따라 많은 농민들은 경작하고 있던 토지에서 쫓겨나 이나 농업노동자로 전락하거나 광산노동자가 되는 경우도 늘어났다. 임금노동자의 증가는 광작의 규모를 더욱 확대시켰으며, 광작의 증가는 농민층의 분화를 더욱 촉진시키는 상승작용을 했다. 이러한 현상은 봉건적 모순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채 봉건사회 말기의 새로운 사회모순으로 등장했으며, 농촌사회 내부의 갈등도 더욱 심각해져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토지를 여러 사람이 나누어 경작하자는 분경론(分耕論)이 나타났는데. 토지의 경작을 제한하자는 한경론(限耕論)이나 뒷날 갑오농민전쟁 당시까지도 농민군의 폐정개혁요구 속에 포함되어 있던,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어 경작하자는 균경론(均耕論)과 같은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사회개혁의 요구는 수용되지 않은 채 조선사회는 외세의 침략을 받아 체제 속에서 편입됨으로써 민족모순이라는 새로운 문제까지 맞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