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사화

신임사화

[ 辛壬士禍 ]

시대명 조선
연도 1721년(경종 1년)

1721년(경종 1) 신축(辛丑)년과 그 이듬해 임인(壬寅)년 두 해에 걸쳐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옥사(獄事).

숙종말 소론은 세자 균(昀, 후의 경종)을 지지했고 노론은 연잉군(延礽君, 후의 영조)를 지지했다. 1721년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경종의 생모인 의 처형을 주장했던 노론은 후환을 염려해 경종이 병약하다는 것을 구실로 연잉군을 서둘러 세제(世弟)에 책봉할 것을 주장했고 소론은 이를 반대했다.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등 이른바 노론4대신을 비롯한 노론의 중신들은 21년 8월 자기들만이 모인 회의에서 경종에게 압력을 넣어 연잉군을 세제에 앉혔다. 이어 2달 후 노론은 세제의 섭정을 주장해 경종은 일시적으로 연잉군에게 정무를 대신하게 했다. 이에 대해 조태구(趙泰耈), 조태억(趙泰億), 이광좌(李光佐), 최석항(崔錫恒)의 소론4대신과 유봉휘(柳鳳輝) 등은 시기상조이며 이는 신하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강력히 반대했다.

경종은 노론과 소론의 주장 사이에서 세제의 섭정을 명했다가 취소하는 결정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이듬해 경종이 소론을 두둔하는 쪽으로 기울어지자 승지 김일경(金一鏡) 등이 노론의 주장을 왕권교체를 꾀하는 역모라고 탄핵함에 따라 노론4대신은 벼슬에서 쫓겨나 귀양을 갔다. 이로써 노론정권은 무너지고 소론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후 다시 남인계 출신인 목호룡(睦虎龍)이 숙종이 죽을 무렵 노론이 경종을 살해하려는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노론4대신은 처형되고 이와 연관되어 수백명에 달하는 노론계 사람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그러나 경종이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죽고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을 다시 기용하는 한편 노론4대신의 죄를 벗겨주고, 그대신 김일경, 목호룡을 처형하고 소론4대신을 추죄(追罪)함으로써 소론정권은 다시 무너졌다. 이러한 과정은 세자 책봉의 명분 아래 전개되었으나 실제로는 이를 이용한 정권다툼으로 노·소론의 당쟁은 더욱 치열해져갔다. 영조는 즉위 후 을 시행했으나 정권에서 물러난 소론 일파는 경종의 죽음에 의혹이 있다는 유언비어를 명분으로 내세워 을 일으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