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병자호란

[ 丙子胡亂 ]

시대명 조선
연도 1636년(인조 14년) ~ 1637년(인조 15년)

청의 침공으로 조선과 청 사이에 일어난 전쟁.

이후 은 조선에 대해 명을 공격하기에 필요한 군량과 병선을 요구하는 등 무리한 요구를 계속했으며 군신의 관계를 강요했다. 더구나 1636년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친 이후에는 압력을 더욱 강화해 노골적인 사대관계를 요구해왔다. 조선정부가 척화파의 주장에 따라 이러한 청의 요구를 거절하자 청 태종은 기병을 위조로 한 10만의 군사를 동원해 조선에 침입했다(1636. 12. 9). 등이 거느리는 조선군은 백마산성에서 청군의 공격을 저지했으나 청군은 기병을 동원해 직접 서울로 진공했다. 당황한 조정에서는 왕자 2명과 왕실을 강화도로 피난시키고 청과의 강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화평교섭이 실패로 돌아가자 인조는 하는 수 없이 (昭顯世子) 및 대신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

그러나 강화도와 서울이 함락되고 남한산성은 청군에 의해 고립되었다. 성 안의 조선군과 그 일대의 백성들은 청군을 상대로 저항을 계속했다. 하지만 원군이 청군에게 패배하고 성안의 식량이 떨어져가자 조정에서는 화친을 하자는 주장과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결국 등 화친론자들의 주장에 따라 조선조정은 포위된 지 45일 만에 청과의 화친에 응했다(1637. 1. 30).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에서 나와 삼전도(三田度, 송파)에서 청 태종에게 큰절을 하는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조선이 받아들인 청의 요구는 「청에 대해 신하의 예를 다할 것」,「세자 및 둘째 왕자, 대신의 자녀를 인질로 보낼 것」,「해마다 황금 100냥 등 20여 종의 물품을 바칠 것」 등 굴욕적인 조건이었다. 병자호란의 결과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끊고 청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전쟁 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두 왕자가 청에 인질로 끌려갔으며, 청과의 싸움을 강력히 주장했던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3학사(三學士)는 청에 끌려가서 처형되고 (金尙憲)도 뒤에 끌려가서 옥중생활을 했다. 뒷날 봉림대군이 귀국해 왕위()에 오른 후 이때의 굴욕을 씻기 위해 청을 정벌하기 위한 이 추진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