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이순신

[ 李舜臣 ]

시대 조선
출생 - 사망 1545년(인종 1년) ~ 1598년(선조 31년)
본관 덕수(德水)
이명 : 여해(汝諧)
시호 : 충무(忠武)
직업 문신, 명장

조선 중기의 무인, 당시의 명장.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 본관은 덕수.

1576년(선조 9) 무과에 합격 후 북방 등지에서 미관말직을 역임하다가 91년 의 추천으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승진해 군비강화에 힘썼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적 수군의 선봉 30여 척을 격파한 것을 시작으로 사천·당포·당항포·한산도 등지에서 잇달아 승리했다. 특히 한산도 앞바다에서는 수군 주력 70여 척을 격파해 해상권을 장악했다(한산도 대첩). 93년에는 부산과 웅천의 왜군 수군을 궤멸시켜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완전히 잡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이순신 함대의 승전은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왜군으로부터 보호함으로써 조선군의 군량확보를 용이하게 했을 뿐 아니라, 적의 보급로를 끊음으로써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또한 이순신은 전쟁 중에도 무기를 제조하고 무관을 뽑는 등 방비의 강화에 노력하는 한편, 토지를 개간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고기를 잡거나 소금을 생산케 했으며, 도자기를 제조, 판매하는 등 군량미의 비축과 백성의 생업을 안정시키는 데도 힘썼다. 97년의 정유재란 직전, 일본군의 계략에 속은 조선정부는 이순신을 서울로 압송하여 사형선고를 내렸으나, 정탁 등의 변호로 목숨을 건지고 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했다. 정유재란 때 새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이 칠천도 앞바다의 해전에서 참패하고 전사하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명랑해전에서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으로 130여 척의 왜군과 대결, 30여 척의 왜선을 격침시키는 등 전과를 올림으로써 제해권을 되찾았다.

도요토미가 죽은 후 왜군이 철수하자 이를 맞아 노량 앞바다에서 기습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나 이 싸움에서 적의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 충성심이 강하고 전략이 뛰어난 용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글에도 뛰어나 난중일기>와 시조 등을 남기고 있다. 전쟁이 끝난 후 권율·원균과 함께 선무공신 1등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