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임진왜란

[ 壬辰倭亂 ]

시대명 조선
연도 1592년(선조 25년) ~ 1598년(선조 31년)

의 침공으로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7년간 계속된 전쟁.

배경

조선왕조의 성립과 더불어 재편성된 조선의 중세 봉건사회는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사회경제적 모순이 표면화 되었다. 양반층은 교육과 관직을 독점하고 각종 역에서 면제되었으며 농장을 확대해갔다. 이에 따라 농민들의 부담은 한층 무거워졌으며 토지를 잃고 몰락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한편 합격자의 증가 등으로 관리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집권 양반층 사이에서도 관직과 토지를 차지하기 위한 대립이 치열해져 가 거듭되고 붕당이 나타났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모순으로 조선의 국방력도 크게 약화되어갔다.

에서는 15세기 말 이래 100여 년간 계속되어온 각지 영주들의 패권다툼시기였던 이른바 전국시대(戰國時代)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그 뒤를 이은 (豊臣秀吉)에 의해 통일되었다(1590). 그러나 내란기간 중 크게 강성해진 무인세력은 여전히 사회의 불안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는 일종의 대아시아 제국을 꿈꾸며 쓰시마 도주를 통해 조선에 수교를 요청하는 한편, 명을 정벌하기 위해 일본군이 조선을 통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조선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도요토미는 자신의 대외팽창 야욕을 채우고 일본 안의 불안요소를 국외로 돌리기 위해 조선 침략을 꾀하며 군비확장에 착수했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일본의 움직임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이에 대한 대비를 게을리했다.

경과

1592년 4월 13일 은 17만여 명의 육군과 3, 4만 명의 수군을 동원하여 부산으로 침입했다. 부산첨사 , 동래부사 등이 이를 막으려고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일본군은 진로를 셋으로 나누어 서쪽은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중앙은 (小西行長), 동쪽은 (加藤淸正)가 각각 부대를 이끌고 진격했다. 조선 조정은 순변사로 과 을 차례로 파견해 일본군을 막도록 했으나, 이일은 상주에서, 신입은 중추에서 각각 패배했다. 그 결과 불과 보름 만에 한양이 함락되고 국왕과 관료들은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했다. 한양을 돌파한 고니시의 부대는 개경(5.27)에 이어 평양까지도 함락시켰다(6.13). 가토의 부대도 함경도까지 북상하여 근왕병의 모집을 위해 함경도에 파견된 임해군·순화군 두 왕자를 생포했다.

국왕 및 조정이 백성을 생각하지 않고 무책임하고 무기력하게 피난민을 거듭하자 민중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어 근왕병 모집에 응하는 사람이 없었고, 왕의 피난길을 막고 욕을 하는 사람도 생겨났으며 백성들은 궁궐과 형조에 불을 지르고 노비문서를 없애버렸다. 그러나 수전의 상황은 달랐다. 이 거느리는 조선수군은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당항포·한산도·부산 등지의 해전에서 잇달아 일본수군을 격파함으로써 일본군의 해상보급로를 차단하고 호남지방을 보호하여 식량을 확보했다.

또한 관군이 패배하자 각지에서는 스스로 고장을 지키고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의병이 일어났다. 의병들은 유격전으로 적의 후방을 교란하고 군량보급을 차단하여 일본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경상도에서는 가 궐기한 이래, ·손인갑·김면 등이 의병을 일으켰으며, 충청도에서는 이 거느린 의병부대가 승려인 의 의병부대와 힘을 합해 청주를 탈환하고 금산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다. 전라도에서는 ·· 등이 의병을 일으켜 충청도까지 진격했으며, 경기의 홍계남, 황해도의 임중량·차은진·김진수·김만수·황하수, 함경도의 등도 의병을 일으켰다. 또한 승려인 (서산대사)과 (사명당)도 각각 묘향산과 금강산에서 승려로 구성된 의병을 일으켰다.

이같은 의병의 항전 및 수군의 승리에 힘을 입은 관군도 점차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을 전개했다. 경상도 의병을 중심으로 구성된 관군은 경주성을 탈환했으며(1592. 9), 이 지휘하는 관군 및 의병의 연합부대는 전라도에 침입하려는 일본군을 진주성에서 크게 격파했다(1592. 10). 한편 의주로 피난한 조선왕실은 이덕형(李德馨)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원병을 요청했는데, 조선이 패할 경우 일본군이 명에까지 침략할 것을 염려한 명나라는 원병을 파견했다. 조선관군과 의병부대는 명의 원군과 힘을 합해 을 탈환했다(1593. 1). 그러나 후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던 명군은 경기도 벽제에서 참패하고 개성으로 후퇴했다.

서울에 집결한 일본군은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행주산성을 총공격했으나 이 지휘하는 관군과 백성들은 배수의 진을 치고 이를 물리쳤다. 이후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으며 명과 일본 사이에서는 화의교섭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의병들의 유격전으로 식량이 부족해지고 본국과의 연락에 어려움을 느끼던 일본군은 전염병까지 돌자 전의를 상실하고 전면적으로 퇴각해 부산 일대의 한반도 동남해안까지 물러났다. 궁지에 몰린 일본군과 명 사이에는 본격적인 강화회담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 중 4도의 분할과 조선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요구하는 등 무리한 조건을 고집하는데다 조선조정도 강화에 반대해 강화회담은 원만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진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군비를 강화하는 등 전열을 정비한 일본군은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97년 재차 총공격을 했다(정유재란). 일본수군은 3도수군통제사가 된 이 이끄는 조선수군을 칠천도 앞바다에서 격파하여 제해권을 장악한 데 이어 일본육군도 북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강화회담 기간 중 군비를 정비한 조선군의 반격으로 왜군의 북상은 충청도 공주·직산에서 그쳤다. 해전에서도 다시 수군통제사에 기용된 이순신이 명랑해전에서 일본수군의 주력부대를 격파하여 제해권을 되찾고, 이어 명의 수군과 연합해 고금도에서 왜군을 크게 격파했다. 이어 조선군과 명군은 수륙 양면에서 일본군에 대한 총공격을 했다. 수세에 몰린 일본군은 가 병으로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조선에서 철수함에 따라 7년간의 전쟁은 끝을 맺게 되었다.

결과 및 영향

7년간에 걸친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3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에서는 사회 경제적으로 일대변화가 일어났다. 전쟁터가 된 조선은 막대한 인력과 재정의 손실을 입었을 뿐더러, 노동력이 부족해지고 농토가 황폐화되어 생산력의 큰 감소를 가져왔으며, 토지대장의 상실로 나 의 징발이 어려워 재정이 고갈되었다. 문화적으로도 전주를 제외한 3대사고가 불타 많은 서적이 없어지고 ·경복궁 등도 불에 타는 등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또한 사회의 모순이 폭발하여 봉건왕조의 위기가 초래되었다. 천민이 양민이 되고 도 관직을 얻는 등 신분제도도 흔들려갔다.

왕실과 관리들은 이를 막기 위해 전쟁 중 군사제도를 개편하는 등 각종 제도의 개혁을 통해 봉건사회의 유지·강화에 힘썼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반해 민중은 사회의 모순, 왕실 및 관리의 부패와 무능을 깨닫고 봉건적 수탈에 대항하여 점차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등 의식이 성장했다.

에서는 도요토미가 죽은 후 (德川家康)가 집권해 에도(江戶)에 막부를 세웠는데, 도쿠가와는 지방을 번부로 나누고 (大名)를 통해 통치함으로써 를 구축했다. 일본도 오랜 전쟁으로 막대한 인적·물적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전쟁 중 일본에 전해진 조선의 문화는 일본 중세문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일본군이 약탈해간 많은 서적들은 일본의 인쇄술 발전에 기여했으며, 일본으로 끌려간 도자기 기술자들은 일본의 도자기업을 크게 일으키는 주역이 되었다. 특히 의 저서인 <주자서절요> <이황통록>은 일본 의 교재로 사용되어 일본 성리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무리하게 원병을 파견함으로써 국력의 커다란 약화를 초래했으며, 명의 영향력이 약화된 틈을 이용해 만주에서 일어난 은 을 세우고 세력을 크게 확대해 명을 위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