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변사

비변사

[ 備邊司 ]

시대명 조선

조선 중기 이후 군사업무를 비롯하여 정치·경제의 중요문제를 토의하던 문무합의기구.

비국(備局) 또는 주사(籌司)라고도 한다. 원래 조선정부는 건국초부터 무관으로 하여금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게 했으므로 군사업무도 와 병조가 협의해서 처리했다. 그러나 성종 이후 야인과 왜구의 침범이 잦아지자 문관만으로 이에 대처하기가 어려워 변방의 사정에 밝은 종2품 이상의 무관도 참석, 문관과 함께 군사업무를 협의하게 했는데 이를 지변사재상(知邊司宰相)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변사재상이 참가하는 회의는 적의 침입이 있은 연후에 소집되었으므로 상황에 즉각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이에 1517년 를 설치해 국방대책을 사전에 논의하게 되었다.

비변사는 처음에는 병조 안의 한 부서로 국방에 관한 중요한 사건이나 왜란 등이 있을 때만 활동하는 임시기관이었으나 1554년(명종 9) 독립기관이 되었으며 이듬해 을 계기로 상설화했다. 임란 때 모든 국가의 행정력이 전쟁을 치르는 데 집중됨에 따라 비변사의 권한은 크게 강화되어 군사업무는 물론, 관리임명·토지정책 등 정치·경제 문제까지도 다루는 최고기관의 역할을 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전후복구와 국방력의 재건이란 명분으로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비변사의 권한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 후기에는 국정 전반을 관장했으며, 심지어 비빈의 간택에까지 관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정권은 국방력의 강화를 내세워 군영을 새로이 설치하는 한편 비변사의 권한을 유지함으로써 정치·군사권을 장악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삼았다.

비변사 업무가 확대되고 권한이 강화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의정부는 실권을 상실했다. 이로 인해 정부의 다른 기관과 권한이 중복되거나 한계가 불분명해지고 행정질서가 어지러워져 여러 차례 폐지론이 대두되었으나 최고기구로서 비변사의 기능은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비변사의 권한확대가 봉건왕권의 유지와 강화에 지장을 주자 1864년(고종 1) 대원군은 의정부와 비변사의 업무를 구분지어 비변사는 외교·국방·치안 관계만을 담당하고 그 밖의 행정업무는 의정부에서 맡아보게 했다. 비변사는 이듬해 의정부에 소속되었으며 1894년 의정부와 함께 폐지되었다. 비변사의 권한확대가 조선 후기의 왕권을 상대적으로 약화시켰다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