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좌의 난

이인좌의 난

[ 李麟佐-亂 ]

시대명 조선

조선 영조 때 이인좌 등 소론 일파가 정권의 탈취를 목적으로 일으킨 반란.

영조가 경종의 세제(世弟, 왕위를 이을 아우)가 되어 정치를 대신하는 데 반대하다가 영조가 즉위한 후 노론에게 정권을 빼앗긴 소론의 일파는 중 과격파, 지방의 토호 및 사대부 등 정권의 중심에서 소외되어 있던 세력들과 손을 잡고 반란을 계획했다. 이들은 흉서(凶書)와 (掛書) 등을 통해 경종이 죽은 원인에 의혹이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동조자를 규합하기에 노력했다. 그러나 1727년(영조 3) 의 일환으로 일부 노론이 실각하고 온건파 소론이 다시 기용되자(정미환국) 더 이상의 동조자 확대가 어렵다는 것을 느낀 이들은 거사에 들어갔다(1728. 3). 이인좌·정희량(鄭希亮) 등은 경종의 사인에 대한 규명과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명분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청주를 함락시켜 병사 이봉상(李鳳祥)을 죽이고 의 증손인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내세워 「왕통을 바르게 한다」는 격문을 이웃 고을에 돌려 정부에 반대할 것을 호소했으며 이인좌는 스스로 대원수라고 칭했다. 삼남 일대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반란이 일어나 한때 삼남지방의 통치체제가 마비되었다. 원래 반란군은 서울과 평양 등지에서도 동조자를 규합해 반군에 호응하도록 계획을 세웠으나 이 사실이 조정에 미리 알려져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이인좌는 안성에서, 정희량은 거창에서 각각 관군에 패함으로써 반란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인좌의 난은 외형적으론 봉건양반층 내부의 정권다툼의 연장이었으나, 역사적 흐름의 맥락에서 볼 때 조선 후기 봉건사회의 재건방향을 둘러싼 지배층 내부의 대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영조는 이인좌의 난에서 탕평책 실시의 명분을 찾아 왕권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노론의 반대세력이 몰락함에 따라 조선왕조의 사회개편 방향은 노론정권의 의도대로 추진되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