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실학

[ 實學 ]

시대명 조선

조선 후기 의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대해 반발하면서 사회의 개혁을 주장했던 학문 또는 사상.

개념 및 성격

의 개념 및 성격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의견의 합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실학을 근대적 사상의 맹아로 보기도 하며, 이와는 반대로 유학자들이 흔히 사용해왔던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원리의 학」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근대의식 또는 근대지향의식과 민족의식을 토대로 재구성된 개신유학이라는 주장도 대두했다. 그러나 근래에는 실학이라는 용어를 언제부터 누가 사용했는가보다는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나타난 사상이라는 역사적 성격을 강조해 실학을 규정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연구들에서는 대체로 초기 실학자들은 에 토대를 두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18세기 말 이후에는 근대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배경

의 발달은 조선 후기의 사회 경제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농업 및 상공업의 발달, 신분제도의 변화 등 봉건적 지배체제의 근본적인 동요는 학자들의 학문태도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가 활발해져갔다. 그러나 봉건적 질서의 유지에 토대를 둔 기존의 이 명분론에 사로잡혀 공리공론만을 되풀이하면서 이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지 못함에 따라 실생활이나 사회적 문제에 대해 보다 깊은 관심을 보이는 학문의 경향, 즉 실학이 나타났다. 한편 이 시기에 도입된 과 · 등 외국의 새로운 사상 또한 실학의 발생과 성장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상들은 조선학자들의 가치관을 변화시켜 중국 중심의 사상에서 탈피하고 새로운 문물에 관심을 가지게 했으며, 과학적인 학문의 태도와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과학시술을 중시하게 됐다.

실학의 범위와 계보

흔히 의 선구적 인물로는 을 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학이라고 불리는 사상의 범위는 매우 광범위하다. 보통 토지개혁을 비롯한 농업문제 전반의 개혁 주장, 상공업 및 기술의 진흥책 등 경제문제와 정치제도의 개혁 논의, 역사·지리·국어학 등 민족문화에 대한 일련의 연구 등이 모두 실학에 포함된다. 적인 학문태도를 가졌다고 해도 이들의 주장이 모두 공통적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을 억제할 것을 주장하는 실학자들이 있는 반면, 이를 더욱 발달시킬 것을 주장하는 실학자들도 있으며, 지주전호제의 부정 또는 옹호의 입장도 서로 다르다. 때문에 실학자를 사상이나 인맥상으로 계열화하려는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지 못하다. 가장 흔히 인용되는 계파분류법의 하나는, · 등 토지 및 행정제도를 비롯한 각종 제도를 개역하고자 주장한 학자들을 학파, 에서 비롯되는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주장한 일군의 학자들을 이용후생학파로 나누는 것이다.

전자에 속하는 학자들은 지주전호제와 수취제도의 개혁, 신분제의 개선, 상공업 및 화폐유통의 억제 등을 주장한 반면, 후자에 속하는 학자들은 상공업의 진흥, 화폐유통의 장려, 기술의 진흥 및 교통·수송수단의 확대, 대외교류에 대한 관심 등을 표방하고 있다. 때문에 이들을 중농적 실학자와 중상적 실학자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들과 구별해 · 등 실증적 학문태도와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학자들을 실사구시학파로 구분한다. 이러한 계파의 분류 방법과는 달리 이익 이전의 학자들을 전기 실학파로 구분하고 이익 이후의 학자들을 이용후생학파와 경세치용학파로 나누기도 하며, 이익까지는 성리학자이며, 이후의 학자들만이 근대사상가로서의 실학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실학자들은 대체로 광범위한 학문분야에 걸쳐 관심을 표방하고 있으며, 그들의 저서 또한 백과전서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 많아서 이들의 사상을 어느 한 유파로 구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실학사상의 계승

사상, 특히 의 사상은 초기 개화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실학의 개혁사상은 개화파의 개혁사상·근대화론에 영향을 주었다. 실학과 개화사상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 사람으로는 흔히 · 등과 초기개화파의 중심인물인 가 지적되고 있다. 한편 실학사상이 갑오농민전쟁 당시 농민군 지도자들의 사상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연구결과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실학과 개화사상을 연결시키는 것은 오히려 개화사상의 근대적 성격을 약화시키는 것이라며 두 가지 사상의 단절을 강조하는 주장도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앞으로도 좀더 깊은 연구가 요망된다.